호야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지 15일이 되었다. 아침에 어린이집에 내려주고 집에 돌아오니 9시 반이다. 2주간의 어린이집 적응기간이 끝나고 오늘부터는 9시부터 4시까지 정상 일과가 시작된다. 적응기간의 마지막 날이었던 어제는 처음으로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자보는 날이었는데 울면서 잠투정을 하긴 했지만 첫날부터 잠들어있는 모습을 보니 걱정이 많이 줄었다.
전에는 집에 돌아와도 집에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고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오면 언제든 호야를 데리러 갈 마음의 준비를 하느라 긴장 상태로 있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뭘 해야 되더라?"
현관에서 신발도 벗기 전부터 버퍼링이 걸린 채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바뀐 일상이 서서히 실감 나기 시작했다. 호야와 정신없이 지낼 때는 무언가를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해야 할 일들이 코앞에 착착 다가와 있었는데 이제는 일들이 저만치서 내게 선택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제일 먼저 신발장에 붙어있는 거울을 봤다. 그러고 보니 출산 이후에 거울을 들여다본 기억이 없다. 어쩌면 푸석해지고 초췌해진 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항상 "왜 이렇게 배가 나왔어? 둘째 임신했어?"라거나 "왜 이렇게 초췌해. 할머니 같다"든가 "왜 이렇게 늙어보이냐"는 둥 내 멘탈이 얼마나 강한지 시험이라도 하는 듯한 장난을 걸었기 때문에(믿기 힘들겠지만 남편은 빈정거린 것이 아니라 나를 걱정해 준 것이다. 나도 남편에게 이런 막말을 잘한다. 우린 직설어법을 좋아하는 부부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내 상태를 짐작할 뿐이었다.
찬찬히 거울로 들여다본 얼굴은 역시 문제가 많았다. 눈 밑은 퀭하고 입술은 시커맸다. 무엇보다 임신 전에는 거의 없던 기미가 눈 옆에서 볼까지 주근깨처럼 포진해 있었다. 화룡점정으로 귀 위쪽으로는 흰머리가 삐죽 솟았다.
"에휴"
나는 흰머리를 손으로 뽑고 내 방으로 들어가 몇 달 동안 구석에 방치해뒀던 내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건들의 자리를 찾아주고, 정리가 안 되는 물건들은 결국 박스 하나에 도로 담았다. 필요하지만 둘 자리가 딱히 없거나, 필요 없지만 버릴 수 없는 물건들이다.
한바탕 자잘한 정리를 마친 다음에는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을 다 꺼내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내 밥은 항상 호야에게 밥을 먹이는 동안 옆에서 곁다리로 반찬 한두 개만 놓고 후딱 해결하곤 했었는데(그나마 호야가 돌 이후에 유아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이런 겸상도 가능해졌다) 오늘은 이전과 달리 반찬을 죄다 꺼내서 20분 동안 느긋하게 식사를 즐겼다. 그러면서, 그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금씩 내가 보였다. 밥을 먹고 있는 내 손이 보였고, 밥을 씹는 움직임과 밥의 맛이 느껴졌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후에는 거실에 널브러진 장난감을 주워 담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급할 것도 없이 조용하고 한가롭게, 그냥 내가 생각한 것을 하기만 하면 됐다. 장난감을 주워 담을라치면 바로 쏟아내 버리는 아기(호야)도 없고, 창문을 열면 거기 꼭 붙어서 방충망을 자꾸 만지작거리는 아기(호야)도 없고, 청소기를 돌리면 쫓아다니면서 청소기 내놓으라고 칭얼대는 아기(호야)도 없었다.
아 맞다 이런 공기의 흐름도 있었지. 갑자기 늘어나버린 시간에 얼떨떨하다. 청소를 마치고 텀블러에 커피를 내려서 노트북 앞에 앉았는데 아직 12시 반밖에 되지 않았다. 아기의 낮잠을 재운 다음 살그머니 나와서 아기가 깨기 전까지 스릴 있게 내 시간을 쪼개서 쓰던 일도 이제 과거가 되어가고 있다.
아무리 안정 애착을 가진 아이도 새로운 기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어린이집에서 정해놓은 적응기간 2주는 지났지만, 앞으로 2주 동안은 더 지켜보려고 한다. 전보다는 한층 걱정과 긴장이 줄어서, 이제는 아기 걱정보다 내 걱정을 해야 될 것 같긴 하지만.
오랜만에 청소한 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