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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바람 Apr 02. 2021

어른들은 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을까?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인생의 관객이 되어야 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자기 인생의 관객이 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는 알 수 없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 주는 말 한 번만 해도 그 말에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게 보통이다. 하물며 삶에 어떤 사건 사고가 생길 때 그 일에 거리를 두고 남의 일처럼 본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게 가능한 일인지는 둘째 치고, 그런 생각에 관련된 기억 하나가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다. 수업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햇살과 풀냄새가 어지러운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앞으로 쭉 이어진 길 한쪽 옆에는 나무가 촘촘히 늘어서 있었고 지붕처럼 덮인 나뭇잎 사이로 빛줄기가 듬성듬성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무척 좋은 상태였다. 그런 공간을 걷는 자체로 꽤 흡족했던 것 같다. 그때 맞은편에서 사람들이 한 명씩 걸어와 나를 지나쳐갔다. 내 눈길을 끈 건 하나같이 표정이 없는 그들의 얼굴이었다. 수심에 잠겨 낯빛이 어두웠고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자신이 어디를 걷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주위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표정에도 놀랐지만, 그들의 표정이 다 똑같다는 데 더 놀랐던 것 같다.  


'어른들은 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때 내가 내린 답은 하나였다. '그들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에 한 생각을 아직까지 가끔 곱씹는다. 그렇다고 지금 내 표정이 그들과 다르다는 뜻은 아니다.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 글을 썼다). 자기 인생의 관객이 되는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일기든 수필이든 시든 자신의 인생이 담긴 글을 쓴다면 그 글을 쓰는 순간에는 자기 인생의 관객이 된다. 글을 쓰려면 그 순간을 돌아볼 수밖에 없으니까. 아니 최소한 자신이 쓴 글을 읽으면서 관객이 되어볼 수도 있다. 여기까지 맞다면 오스카 와일드의 저 말은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글을 써야 한다'로 바꿀 수도 있다.


그럼 반대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래서 고통을 덜기 위해 무의식 중에(또는 의식 중에)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길어진다. 머리가 아파져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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