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평상시 메던 크로스백 대신 백팩을 메고 출근했다. 왜냐하면 퇴근할 때 러닝을 해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가방 안에는 지갑이나 다이어리 외에도 평소 뛸 때 입던 반팔티나 레깅스 등이 저녁 러닝을 위해 들어 있었다. 신발은 원래 운동화를 신고 출근했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 쓸 건 없었다.
업무 시간 내내 의자에 걸려 있는 백팩이
"오늘 달리기 할 거지? 꼭 해야 돼."
하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드디어 6시 퇴근 시간.
'뛰긴 뭘 뛰어. 그냥 평상시처럼 집에 가자.'
피곤해서 만사가 귀찮아졌다. 게다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누군가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왠지 너무 창피할 것 같았다.
뛸지 말지 갈등하다가 일단은 평소 퇴근길이 아닌 하천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주민센터 바로 앞을 지나는 하천의 물줄기가, (약간 돌아가긴 하지만) 집 방향과 2/3 정도 동선이 겹치는 걸전에 지도에서 확인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을 이용해 달리기를 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쪽 길로 퇴근하는 건 처음이라 어디까지 하천길을 따라가야 할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스마트폰과 교통비가 있고 대중교통이 잘 발달된 시대라 길을 잃는다 해도 딱히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하늘은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하천길 쪽으로 내려오는 동안 거짓말처럼
'한번 뛰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바깥공기를 마시고 물소리를 들으면서 조금씩 기운이 났나보다. 옷은 갈아입지 못했지만 입고 있던 복장도 반팔티에 가디건, 슬렉스 차림이라 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핸드폰에서 달리기 어플을 켜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요즘 반복하고 있는 '30분 달리기 능력 향상' 프로그램 중 15분씩 두 번 뛰는 날이라는 트레이너의 안내 음성이 들렸다.
'일단은 15분 뛰어보고, 그다음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달리기를 할 땐 항상 '실패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다. 그래야 시작하기 전에 포기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그렇게 슬금슬금 달리기를 시작했다.
어깨에 멘 백팩 때문에 평소보다 뜀박질이 무겁긴 했지만 처음 보는 풍경에 금세 마음을 빼앗겼다. 이어폰 너머로 물소리가 옅게 들리고, 새와 풀과 나무가 정체된 찻길의 불빛을 대신했다. 전날까지는 건널목이 많은 찻길 옆 좁은 인도를 걸었었는데, 지척에 이렇게 다른 길이 펼쳐져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퇴근을 하는 사람들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그럼에도 찻길 옆보다는 한결 조용하고 여유로웠다.
종종종 뛰는 동안 금방 땀이 나기 시작했다. 15분을 달린 후 잠시 걸으면서, 가디건을 벗어서 백팩 안에 넣었다. 아무리 봐도 운동복을 입지 않고 운동을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지만 그런 건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퇴근 시간에 운동을 할 수 있는 것 자체로 너무 기뻤기 때문이다.달리기 시간을 따로 내기가 어려운 적이 많았는데 앞으로는 그런 걱정을 덜게 됐다. 이제는 호야 픽업을 담당하는 날(=차를 갖고 출퇴근하는 날) 외에는 달리기를 꾸준히 할 수 있게 됐다. 무의미하게 보내던 퇴근 시간을 운동으로 채울 수 있게 된 것도 물론이다.
30분 달리기는 생각보다 먼 곳까지 나를 데려다줬다. 평소 퇴근 루트가 '도보 30분 + 지하철 2정거장 + 도보 10분'이었는데, (하천길이 돌아가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달리기를 마치고 나니 '지하철 1정거장 + 도보 10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달리기를 끝내고 땀이 줄줄 흐르는 채로 지하철을 탈 땐 좀 부끄럽기는 했다(다른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뿌듯함에 취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달리기를 한 것도 좋았지만 달리면서 본 풍경도 반짝반짝 마음에 남았다. 늘 다니던 길로 퇴근했다면 알지 못했을 풍경을 그날 처음으로 마주했다.
작은 일탈은 쉬워 보여도, 생각보다 실천하기가 어렵다. 늘 하던 대로 하려는 습관 때문이다. 하지만 실천에 옮기기만 하면 낯선 경험과 휴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퇴근길 달리기는 내게 짧은 여행과 같았다. 이 여행이 일상이 될 때까지 퇴근길 달리기를 지속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