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헤비메탈 기타리스트였다
실패가 내게 남긴 것
10여 년 전 내 꿈은 헤비메탈 기타리스트였다. 하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그 꿈은 파도가 부서지듯 무너졌다.
헤비메탈이라는 장르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나 역시 23살 봄, 갑자기 기타가 배우고 싶어서 찾아간 연습실에서 헤비메탈을 처음 들어봤다. 처음 배웠던 곡은 judas priest의 electric eye였다. 시원한 일렉 기타 소리에 설렜다. 뭣도 몰랐지만 그 셀렘을 계속 따라갔다.
그 후 3년 동안 기타를 배웠다. 처음 1년은 취미 삼아 가볍게 다녔고, 시간이 지날수록 취미가 아닌 업으로 삼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낯설었던 헤비메탈은 이미 삶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랜디 로즈의 곡과 연주를 열렬히 사랑했고, Mr. Crowley 같은 곡을 만들고 싶었다.
연습실은 대중교통으로 편도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반을 간 다음 지하철을 15분, 그리고 다시 버스를 15분 정도 타야 했다. 내가 그 먼 곳에서 다닌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들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난 멀어서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집과 연습실 사이에 있는 서점에서 일하면서 계속 기타 연습을 했다. 나이는 점점 많아지는데 취직할 생각은 안 하고 기타나 치는 나를, 집에서는 힘들어했다. 가족들은 내가 제대로 된 직장에 자리잡기를 원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나에게 하루 시간을 내라고 하시더니, 북적이는 도심의 어느 건물 옥상으로 나를 데리고 올라가 말했다.
"세상은 넓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치열하게 열심히 살고 있다"
"한번 뒤처지면 따라잡을 수 없다"
내가 좁은 시야에 갇혀있다고 여겼던 아버지는 그 옥상에서 내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려 했다.
과연 눈 앞에는 수많은 빌딩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바삐 걷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다니던 그 연습실 안에 우주가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허름한 반지하 연습실이었고, 분명 나는 기타 치는 것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곳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 멀리 갈 수 있었다.
시간이 더 흐른 후 나는 26살이 됐고, 결국 아버지는 나를 설득하는 일을 포기했다. 네 꿈이 정 그렇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아는 음악 관계자가 있으니 가서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 관계자가 밴드를 만드는 중인데 기타 칠 사람을 구한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도 아닌 일본에 있는 음반회사 관계자였다. 일본에서 음악 할 생각도 없으면서 그곳에 가서 오디션을 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기회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기로 결정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나중에 '그때 거기 갔더라면'식의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디션 직전까지 도망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내 한계를 실감하고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곡을 쳐봤자 나보다 잘 치는 연주자는 넘쳐났고, 나는 연주자에서 음악가로 좀체 나아가지 못했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행복하긴 했지만, 동시에 불안을 견디는 일이었다. 자신감이 없던 시기였고 도전하는 일이 두려웠다.
오디션 당일, 결국 그 음반회사 관계자 앞에서 기타를 쳤다. 손이 덜덜 떨렸고, 그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끝까지 들어준 그들의 인내심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연주가 끝난 후, 그는 나에게 기타 코드를 하나 보여주며 즉흥 연주를 할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못한다고 했다. 오디션은 그렇게 끝났다.
낙심했지만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늘 하던 대로 연습실을 나갔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낼 수 있을 줄 알았고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어쩐지 전 같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난 이미 다른 사람의 평가에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몇 주 후, 나는 연습실에 가던 발길을 멈추고 근처 피시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열정도 생기지 않았다. 어두침침한 피시방 구석에 틀어박혀 늦은 시간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오한이 조금 들었던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꿈을 향한 절박함이 내 안에서 싸우며 나를 괴롭혔다. 결국 나는 불안감에 짓눌렸고 이겨내지 못했다. 나는 오래 울었다.
일본까지 가서 한마디로 망신을 당한 나는 꽤 오래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 그 정도 실력을 갖고 꿈이랍시고 설친 것도 부끄러웠고, 꿈을 향한 마음이 생각보다 절박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일도 힘들었다. 그깟 오디션, 한 번의 경험으로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을 텐데 나는 힘없이 무너지는 나를 구하지 못했다. 진짜 실패는 오디션에서 떨어졌을 때가 아니라 내가 꿈을 포기한 순간에 찾아왔다.
그 뒤로 기타는 거의 잡지 않았다. 한동안은 티브이에서 기타 치는 장면만 나와도 눈길을 돌렸다. 오랫동안 그 실패는, 내게 남긴 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실패의 덕을 보는 순간들이 생겼다. 그때의 기억이 몇 번씩 소환돼 나를 돕거나 또 다른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덕을 본 것 중 하나는 임계점을 넘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기타를 너무 잘 쳐서 넋을 잃고 바라보던 몇몇 연습생들이 있었는데, 꾸준히 연습실을 다니는 사이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을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 그전에는 그런 희열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 경험은 이후 나의 삶에 소중한 거름이 되었다. 어떤 일이든 꾸준히 하면 어느 순간 갑자기 실력이 느는 때가 온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걸 알게 된 후로 뭔가를 할 때 당장 눈에 보이는 발전이 없어도 전처럼 초조해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실패 자체만으로는 성공의 어머니가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되려면 실패한 이유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고 반성하는 시간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실패를 마주 보고 고쳐나가는 과정은 무척 고통스러워서 도망치기 쉬웠다. 예전의 나도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해 포기했던 것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그 후 다른 꿈에 도전할 때 더 열심히 하는 마음가짐이 생겼다. 잃어버린 꿈에 대한 예의 혹은 보상심리였던 것 같다. 이 꿈마저 놓쳐버리면, 전에 한 실패의 무게마저 가벼워 보일까 봐 그게 싫었다. 결과적으로 다른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됐다.
10년이 더 지났지만 그때의 실패는 여전히 쓰리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감당하지 못해서 내 손으로 보낸 것과 비슷한 감정일 것 같다. 하지만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뭔가 잔뜩 써놨지만, 이런 생각들과 상관없이 가끔 생각한다. 그때 포기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주위에서 나를 찔러대는 말들은 신경 쓰지 말고 네 길을 계속 가라고. 그게 네 인생의 정답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