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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바람 Dec 17. 2021

지켜주고 싶은 아이의 말

생후 23개월 때의 기록


두 돌 즈음 호야는 말이 부쩍 늘었다.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은호야 은호.”

하며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확실히 인식하고, 장난감을 손에 들고

“은호 거야 은호 거.”

하면서 자신의 소유물을 구분한다. 자아가 강해진 만큼 자신이 결정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이제는 입혀주는 옷을 순순히 입지 않고 “빨간색” 또는 “파란색” 또는 “할아버지 색(하얀색)”이라며 내가 입히려던 옷을 집어던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아기라는 말보다 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게 됐다. 돌 무렵에는 걷는 연습 하며 넘어지기 바빴는데 이제는 쉴 새 없이 재잘대니 언제 이렇게 컸나 싶고 인간이 커가는 모습이 참 신비롭다.


가끔 아이의 예쁜 말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몇 주 전에 겨울바다를 보고 왔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바다를 간 것도 아이 덕분이었다. 내가 바다 보러 가고 싶다고 아무리 말해도 "이 추운 날에 따뜻한 집을 두고 왜 굳이?"라며 귓등으로 듣던 집돌이 남편이 

“어디 가고 싶어?”

라고 묻는 내 물음에 아이가

“바다.”

라고 대답해주는 덕분에 영흥도에 갈 수 있었다. (남편은 아이가 “바다”라고 대답하도록 내가 세뇌시킨 것이 아니냐고 의심했지만 단연코 순수한 아이의 바람이었다)


겨울바다는 생각보다 추워서인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우리처럼 아이랑 온 가족이 쭈그리고 앉아 모래놀이를 하고 있었고 몇몇 커플과 노부부가 모래사장 위를 거닐고 있었다. 바다는 탁 트인 짙푸른 수평선을 보는 것도 좋지만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철썩 쏴아 하는 파도 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 호야는 "얍!" 하며 모래를 바다에 뿌리며 놀기도 하고 조개껍데기를 주으며 다니기도 했다. 한동안 그러고 놀더니 어느 순간 바다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여름에 엄마 아빠의 도움을 받으며 파도를 타고 놀았던 일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추워서 안돼. 들어가지 마.”

아무리 설명해도 호야는 막무가내였다. 몇십 분 동안 호야를 붙잡느라 힘이 빠진 남편과 나는 호야의 발을 바닷물에 빠트리는 것으로 상황을 종결했다. 참방 발이 빠진 호야는 찬 바닷물에 당황했는지 맹렬하던 기세가 꺾였고 그런 호야를 그대로 들어 올려 바로 차로 돌아가 신발과 양말을 벗기고 바지를 갈아입혀 귀가했다.


집에 돌아온 후 빨아서 현관에 말리고 있던 신발을 보고 다음날 호야가 말했다.

“바다 묻었어.”

아이의 발음이 아직 정확하지 않아 한동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다가 그 말이 “바다 묻었어.”라는 걸 알고

“아, 바닷물에 젖었어?”

라고 고쳐주다가 멈칫했다. 바다 묻었어, 라니 너무 멋진 말이다, 생각했다. 그저 축축한 신발이 아니라 정말로 신발에 묻어있는 파란 바다가 보이는 것 같았다. 굳이 그 말을 고쳐주고 싶지 않아

“맞네 바다 묻었네.” 했다. 나도 아이 같은 표현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아이의 표현을 틀에 가두는 엄마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모자라고 고집하는 어른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호야님 바다로 돌진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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