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의 기억

by 안뇽안뇽안늉

여름휴가를 마음먹고 가는 편은 아니다. 방문 지역을 불문하고 (국내 포함) 여행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매한 계절에 휴가를 떠날 때가 많긴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성수기라는 자각 없이 어딘가로 짧은 휴가를 다녀왔다. 상반기를 정리하는 동시에 하반기에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해 보는 적절한 시기란 바로 여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상반기와 하반기에 애매하게 걸쳐있는 여름이라는 계절에 나 자신의 중간 결산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고, 그럴 때면 어딘가로 무작정 (최대한 경비를 아낄 수 있는 곳으로…) 가곤 했다.


2021년의 2박 3일 묵호 여행 또한 그러했다. 처음 가 본 지역이었는데 관광지도 아니라서 성수기지만 사람도 없었다. 정말 좋았다. 대행사 다닐 때라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고, 이직 면접도 연거푸 탈락해서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1년의 반이 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무리하게 이직을 결정하느니, 차라리 한 해 버티고 성과급이나 받자 싶었지만 어쨌든 원래의 목표에서 한 걸음 물러나야 한다는 자체로 상심이 컸다. 마음 정리나 하자는 생각에 연차를 쓰고 8월 중순에 묵호로 갔다. 소나기가 내린 후에는 습기가 끈적끈적하게 내려앉았고, 날이 맑아지면 열기가 지글댔다. 여기저기 걷다가 너무 지쳐서 아무 상점이나 들어가기도 하고, 걷다가 도저히 못 걷겠어서 포기도 하고 그랬었던 것 같다.

그래도 카페 통창 너머로 바라보는 묵호항은 정말 예뻤다. 손님도 없어서 카페 겸 내가 머무는 숙소의 주인분이 아예 오후에는 카페 문을 닫고 숙소 예약자만 쉴 수 있게 해 주셨다. 덕분에 사람 한 명 없이 나 혼자 카페를 전세 낸 듯한 기분으로 묵호항 풍경을 실컷 즐길 수 있었다. 진열된 책도 읽고, 일기도 쓰면서 내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 나니 조금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도 차분하게 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묵호에 오기 전에는 이직에 대한 체념으로 마음이 소란해서 사무실에 앉아있어도 괜히 잡생각이 많았다. 너무 덥든, 날씨가 궂든, 숙소비가 비싸든 간에 그 당시의 나에게는 정말로 ‘쉼’이 필요했던 것 같다. 매일 새벽 1~2시에 사무실을 나서면서 몸까지 녹초가 되니까 말 그대로 몸이 쉬어줘야 했다.

휴식에 대한 갈증을 아주 적절하게 해소했던 묵호 카페에서의 그 고요한 기억은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선명하다. 비가 그치고 난 뒤라 햇빛도 적당하게 들어왔고, 통창 너머의 묵호항 풍경도 시원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는 심각했던 여러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묵호에서의 둘째 날을 마무리했던 것 같다.


이처럼 지나고 나면 당시에 힘들었던 일들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사사로워 지는 것 같다. 여름의 여행 또한 그렇다. 마치 한증막이라도 들어온 것 같고, 푹푹 찌는 더위에 숨을 들이마시는 것도 텁텁해서 어디라도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힘이 든다. 이건 뭐 국토순례도 아니고 내가 고생을 사서 하는구나 싶은데, 지나고 보면 또 그런 온갖 궂은 기억들은 휘발되고 그때 당시의 좋았던 감각들만 남는다. 강렬한 태양빛에 윤슬 또한 더욱 눈부셨던 홍콩의 바다, 걷기를 포기하고 들어간 술집에서 들이킨 맥주 한 모금 등등.

이번 여름도 지나고 보면 좋은 기억들만 남을 것이다. 우리의 출퇴근길을 성가시게 했던 러브버그나 잠 못 이루게 하는 요즈음의 열대야는 앞으로 만들어갈 여름의 좋은 기억들로 쉬이 덮이리라 생각한다. 후일에는 여름 배경의 영화 속 장면처럼 맑고 청량한 순간들만 남으리라 믿는다. 올여름도 종종 힘들고 종종 즐거울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5년 상반기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