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반영 100%, 로맨스인 듯 아닌 듯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로 지나가버린 시간과 감정을 오랜만에 재회한 두 남녀를 통해 담백하게 그려냈던 감독 셀린 송의 차기작, <머티리얼리스트>. 8월 첫째 주 개봉 소식을 눈여겨봤고 오늘 극장에서 봤다. 러닝타임이 대부분 2시간 남짓이지만 숏폼에 길들여진 터라 영화에 오롯이 집중하기 힘든 요즈음,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 영화였다. 여자 주인공이 내 나이대이기도 했고, 나 포함 요새 주변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현실반영 100%의 영화라 더 몰입해서 봤다. 단순한 로맨스물은 아니었고, 오히려 다른 어떤 영화보다 철학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루시(다코다 존슨)는 뉴욕의 잘 나가는 결혼정보회사 매칭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업무 특성상 사람을 정량적으로 ‘측정’ 하는 데에 능숙하며, 본인 역시 결혼은 비즈니스이고 이를 위한 매칭은 단순한 수 계산이나 다름없음을 잘 알고 있다. 매칭시킨 고객의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부유한 사모펀드 매니저인 해리를 만나게 되는 루시는 동시에 전남자친구이자 출장 뷔페 아르바이트생인 존을 마주친다. 두 남자 모두 루시에 대한 호감을 표현하는 상황에서 루시는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현실과 끌림 사이에서 진행되는 루시의 갈등은 영화의 큰 줄기이자 메시지이다.
굳이 ‘사랑’이 아닌 ‘끌림‘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개개인마다 사랑을 제각각으로 정의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건을 보고 시작한 만남은 사랑이 아닐까? 마음에서 우러나 시작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을 키워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점에 정통성이 없으므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걸까? 개인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루시가 존이 아닌 해리를 선택했을 때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맞을 것이다. 사랑이란 마음의 동함 그 자체이므로 마음을 우선하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여지가 있다. 이처럼 현대인들의 사랑은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그 모양이 천차만별일 수 있겠다.
다만 최근에는 현실적이라는 수식을 빌어 사람을 계량하는 일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 같다. 마치 그래야만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계산을 간과하면 세상 물정 모른다는 말을 듣기 일쑤다.
루시의 클라이언트들이 원하는 상대의 조건, 이른바 스펙을 읊는 장면에서는 나 또한 생각이 많아졌다. 나 또한 은밀히 세워놓은 조건의 울타리 안에서 관계 형성을 꿈꿨던 것은 아니었는지. 진짜 내 마음을 줄 수 있는 상대는 이 울타리 너머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조건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결코 옳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고, 앞서 말했듯 키워나가는 사랑도 있지 않은가? 다만 현실과 낭만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에서 지금의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적절하게 타협할 것인지, 불확실한 미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앞세워 용기를 낼 것인지. 선택에 정답은 없고, 둘 중 어떤 것이 남은 미래를 행복하게 해 줄지도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되묻는다. 정말 단순한 가치 계산으로 당신의 인생을 결정하겠느냐고.
연애 프로그램 속 출연진들의 은근한 스펙 비교는 이미 차고 넘치며, 유튜브에는 결정사 매니저들이 대놓고 사연자들의 등급을 매긴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지만 인간과 상품이 한 끗 차이인 작금의 상황에서 영화의 비판적인 메시지는 충분한 울림을 준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은 상품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이다. 수치화된 것들에 가려져 정작 사람을 못 보지는 않았는지 한번쯤은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사랑의 가치마저 비교하는 세상에서 조건 없이 마음을 살피는 일이란 무척 어렵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