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여름의 마무리

다사다난했던 올여름

by 안뇽안뇽안늉

정말 많이 움직였다. 일도 이것저것 벌려놔서 매주 나갈 일이 생겼고, 그만큼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25년 여름은 8월 회고글에도 올렸던 것처럼 정말 정말 잊지 못할 여름이 될 것 같다.


1. 제주 고향집 방문

부모님이 가끔 서울에도 올라오시는 편이라 명절이 아니고서는 굳이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짧게 다녀와야 하고, 연휴가 아니면 주말을 이용해야 하니 항공권도 비쌌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들어서인지 갑자기 집이 가고 싶어졌다. 부모님과 함께 집밥도 먹고 싶었고, 무엇보다 제주도 조용한 곳에 혼자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서울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 우울할 것 같았던 주말, 충동적으로 그다음 주 월요일에 오전 반차를 쓰고 제주도 항공권을 끊었다. 익숙하면서 평화로운, 조용한 나의 공간에 가는 일이 절실했던 시기였다. 주변의 일로 마음이 무척 소란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하나를 결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와중이라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금요일 퇴근 후 바로 제주로 내려갔다. 훌쩍 떠나고 싶을 때 갈 곳이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딸이 내려온다니 엄마는 해주고 싶은 반찬을 이것저것 많이 만들어 놓으셨더라. 내가 좋아하는 갈치조림, 불고기, 두부조림, 한치국 등등… 역시 사 먹는 반찬보다 집밥이 최고다. 풍족한 첫 밤을 보내고, 그다음 날에는 내가 가고 싶었던 북카페를 갔다. 정해진 시간만큼의 이용료를 내면 1인 공간을 빌려준다.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창문 너머 제주 고산의 조용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하는 상념은 서울에서의 그것과는 많이 다를 것 같았다. 집에서 많이 먼 곳이라 나 데려다준다고 아버지가 고생을 좀 하셨지만 ㅎㅎ


정말 좋았다. 2시간 30분가량 듣고 싶은 음악을 들었다. 그러면서 창 밖도 보고, 이런저런 어지러운 마음도 정리해 보고, 책도 읽고. 절대로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 짧은 휴식이 그때의 나에게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절실했던 것 같다. 조용하게 보낸,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을 가진 것만으로도 제주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산에서 제주시로 들어올 때는 버스를 탔는데, 약 1시간 40분 걸렸지만 그래도 좋았다. 창 밖 너머의 풍경이 서울과는 차원이 다른, 복잡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단순한 모양들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2. 짧은 시작과 끝

꽤 오래 호감을 키워가던 친구와 정말 짧게 만났고, 끝났다. 먼저 정리하자고 한 것은 내 쪽이었지만 헤어짐은 언제나 늘 편치 않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의 만남에도 배우고 깨닫게 되는 지점은 분명히 있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또 내게 마음을 써주는 사람을 만난 것 또한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일인지 말이다. 나는 그 친구로부터 ‘마음을 쓴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게 되었다.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한다. 관계 속에서만 배워나갈 수 있는 것들, 정말 나의 마음을 써 보아야지만 알 수 있는 그런 것들 말이다. 원래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상처받고, 상처 주는 것의 연속이라 감정 소모를 하기 싫어서 시작조차 못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30대 중반의 나는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끝에 다다랐더라도 언제나 깨닫게 되는 것들은 있다. 그 친구가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무도 못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이라는 것이 인생의 중요한 가치인만큼, 그것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인연을 만나길 바란다.’라고. 상대를 위해 진정으로 애쓰는 마음, 다정하게 구는 마음이란 이런 것들이 아닐까?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이토록 따스한 마음을 건넨 적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나이만 먹고 여전히 미성숙한 나는 올여름에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다.


3. 독서모임 번개

두 번째로 열어보았다. 나서는 성향이 아니어서 그런지 먼저 제안을 할 때도 조금 쑥스러웠다. 벌써 4년 이상 부대낀 사람들이지만 왜 아직도 부끄럽고 주저하게 되는지. 소설 <혼모노> 속 단편의 배경이 된 ‘남영동 대공분소 (현재는 민주화운동기념관)‘ 를 꼭 둘러보고 싶었다. 소설 속에 디테일하게 묘사된 건물이 실제로는 어떠한지 궁금했다. 의외로 많은 분들이 같이 참여하셨고 (정기 모임보다 출석률 더 좋음 ㅋㅋㅋㅋ) 같은 소설을 읽은 터라 보고 나서 나눈 이야기들도 좋았다. 확실히 결이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이야기와 활동은 그 자체로 활력이 된다.

끝나고 카페에서 수다 타임. 역시나 빠지지 않은 연애와 결혼 이야기… 그 소재로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독서모임에서 만났든, 어디에서 만났든 역시나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다.


4. 15년 만의 롯데월드

계모임을 하는 친구들과 롯데월드를 다녀왔다. 액티비티를 하고 싶은데 날은 덥고, 그래서 멀리 나가자니 귀찮고… 하다가 생각해 낸 곳이 롯데월드. 롤러코스터 타고 소리 지르다 보면 어느새 도파민이 팡팡 나올 것 같은 기대감에 다들 부풀어 있었다. 교복을 입자고 제안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ㅋㅋ 말렸고, 말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입었으면 너무 안 어울렸을 것 같은데 상상해 보는 것조차 아찔하다.

15년 만에 놀이기구를 원 없이 탔던 것 같은데, 물론 주말이라 인기 있는 어트랙션은 못 타고 웨이팅이 덜한 것들부터 하나씩 타기 시작했다. 시뮬레이션만 타도 신났던 우리들… 초등학생도 그렇게 소리 안 지르는데 우리는 시뮬레이션에서 덜커덩거리기만 해도 꺅꺅댔다. 하고 나니 부끄러웠는데 또 그럴 때 아니면 언제 해보랴 싶었다. 범퍼카도 누구보다 해맑게 탔던 우리ㅋㅋㅋ 그냥 우리끼리 아무 생각 없이 그 자체로 즐겁게 보낸 시간이었다. 이야기도 필요 없다. 고민상담도 필요 없다. 그냥 그 순간을 웃으면서 즐기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 해소가 제대로 된 느낌이었다. 특히 롤러코스터 탈 때 원 없이 소리 질렀는데 노래방에서 몇십 번 내지르는 것보다 훨씬 더 시원한 느낌. 여러모로 좋았다. 다음번엔 에버랜드를 가자며…

올여름의 캘린더를 보았다. 작고 큰 일정들로 빼곡하더라. 건강검진으로 인한 병원 예약으로 7월 첫째 주부터 부단히 바빴고, 이것 외에도 친구들과의 약속, 전시, 작은 영화제 등등으로 집순이 치고는 너무나 바쁜 여름을 소화했다. 원래 이 정도 움직이면 지쳐서 나가떨어져야 정상인데, 폭염이라 에너지 소모가 더 컸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정도로 버텼다는 것은 즐거운 일들이 피로함을 이길 정도로 더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병원을 들락날락하면서 걱정으로 잠 못 이루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이 해결되었을 때 일상의 만족감이 더 커진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롯데월드에서의 롤러코스터보다 더 역동적이었던 25년도 여름이었다. 그리고 내 주변의 마음들에 감사했던 여름이기도 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5.8월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