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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Sep 17. 2020

詩畵 '바람이 분다'

미처가 (美妻歌) 제6장 : 아내는 그리고 남편은 쓴다 (I) 

 천사 같은 아이들이 자라 학교에 다니면서 아내와 아이들 간에 사소한 마찰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중립국 스위스처럼 중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누구 편인가?'를 명확히 밝혀야 하는 시점이 왔다. 정치적 입장과 생존의 관점을 고려해 조용히 아내 편에 합류했다. 아이들과의 분쟁의 이유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부모님은 충분히 짐작하리라 생각한다. 설명하자면 끝이 없다. 


 아이들의 뽀얀 우유빛깔 살결에 뽀뽀하기 좋아했던 내 입도 마치 못된 마법사의 흑마술에라도 홀린 것처럼 잔소리를 토해냈다. 처음이 어렵지 한번 시작하니 그칠 줄을 몰랐다. 머리로는 '이건 아니지' 하면서도 입은 쉬지 않고 내달렸다. 프로 레슬링에서나  볼 수 있는 태그 매치(Tag Match)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었다. 링 아래서 그리고 링 위에서 싸움은 계속되었다.    


 지난해 제주 한 달 살이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여럿 있었지만, 아이들과의 관계 회복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한 송이 꽃 같던 아이들이 눈앞에서 가라앉는 모습을 손 놓고 지켜봐야만 했던 그 사건 이후, 아이들이 그저 우리 곁에서 건강하게 자라 주는 것만으로 고맙고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불행을 마주하고 비로소 깨닫게 된 삶의 순리(順理)였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는 못했다. 맹세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결심은 부메랑처럼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잔소리가 늘어났고 요구하는 것이 많아졌다. 그래도 아직 가슴으로는 아이들이 처음 우리에게 왔을 때의 그 눈빛을, 그 마음을 잃지 말라는 울림이 계속되고 있었다. 자정 능력이 부족하니 외부에서 무언가 충격을 줄 시점이었다. 

      

 그래서 제주로 향했다. 사실 제주도는 아내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었다. '오늘부터 1일 차야!' 하고 연애를 시작하고 둘이 함께 간 첫 여행지가 제주도였다. 결혼 후 매해 제주를 찾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에메랄드빛 바다, 신비롭기까지 한 한라산과 오름들, 하루에 세 끼만 먹을 수 있다는 걸 부정하게 만드는 맛있는 음식들, 그리고 뭍에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해방감까지, 제주는 그 존재만으로도 큰 위안을 주는 곳이었다. 그런 제주에서라면 부처님과 예수님도 샘낼만한 자비로움과 사랑으로 아이들과의 관계를 되돌아보고 처음 만났을 때 그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내에게도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 가사와 육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해 주고 싶었다. 일을 핑계로 경제력을 핑계로 아내에게 빼앗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었다. 사실 1인 절대권력 체제인 우리 집에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내의 마음이 평안해야 가족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으니. 


 이런 충심을 살짝 귀띔해 주자 '그럴 것까지 없어.'라고 말은 하면서도 아내는 다양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림도 배우러 다니고 새벽 일찍 일어나 수영장도 다니고 싶다고 했다. 요즘 들어 제주에 부쩍 늘어난 동네책방과 미술관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가 보고, 서핑도 꼭 배워 보고 싶다고 했다. 아내가 무언가에 들떠 있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다 편해졌다. 회사에서는 한 번도 윗사람 눈치를 살핀 적이 없던 내가 집에서는 그렇게 처세에 능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둘째가 태어난 지 1년이 안되었을 때였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산후 우울증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무렵이라 덜컥 겁부터 났다.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이라고는 보이지 않던 아내라 그 모습은 나를 몹시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솔직히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고심한 끝에 결국 몰래 숨겨 둔 비상금을 탈탈 털어 지금으로 말하면 '호캉스'를 아내를 위해 예약해 주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도 아니었지만,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해 최소한의 '육아 해방과 진정한 휴식'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하룻밤 정도는 어찌어찌하면 아이 둘 감당 못하랴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아내가 얼마나 힘들게 육아를 하는지, 아내의 힘듦과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아내는 아내대로 호텔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쉬는 시간을 가지면 기분이 한결 좋아지리라 생각했는데 아이들과 내가 걱정이 되어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아내도 측은지심이 발현되었던 것 같다. 육아에 관한 문제가 속 시원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비상금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 


 아이들과의 크고 작은 갈등, 그것 자체가 삶인지도 모르겠다. 원래부터 해결할 수도, 해결되지도 않는 삶이 우리에게 부여한 과정. 문제는 항상 거기에 있고 그걸 담는 그릇이 계속 커지니 넘치지는 않는,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태위태해 보이는 여정. 하지만 적어도 서로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기회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제주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아껴주는 가족이 되었으니까. 


 며칠을 제주의 바닷가에서 쉼 없이 놀다 지쳐 하루는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쉬기로 했다. 날이 너무 좋아 테라스에 수영복과 물놀이 장비들을 말리려고 내놓았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은 가져간 책과 만화책을 보며 지들끼리 뭐가 좋은지 신나게 떠들어댔다. 한가로운 제주의 오후였다. 시원한 바람 때문인지 피곤해서였는지 아내와 나는 잠깐 잠이 들었다. 딱 내가 원하던 그만큼의 평화였다. 아내도 이때 기억이 오래 남았는지 집에 돌아와서 그때의 인상을 그림으로 남겼다. 부창부수(婦唱夫隨)라고 아내가 그림을 그리니 그 그림에 맞춰 시를 한 편 써보기로 했다. 부끄럽지만 그 작품들을 소개해 볼까 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평화로운 제주의 오후가 전해지면 좋겠다. 

<작품명 : 바람이 분다 by 슈퍼 발차기>

  

  모처럼 볕이 좋아 빨래를 했다.

  마당 빨랫줄에 젖은 옷을 널면서

  내 마음도 살짝 걸어 두었다. 

  바람에 살랑대는 옷들처럼

  제주, 뜨거운 바람이 정겹다.

  

  '5분만 눈감고 있을 게’ 하던

  아내는 한낮의 꿈나라로 떠나고,

  책 읽던 아이들은 어느새 

  전사가 되어 손바닥 전장을 누빈다.

  제주, 한가한 오후가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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