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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04. 2020

이토록 황당하고 억울한 변신

고전의 재味발견 : 변신 by 프란츠 카프카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곤충강 딱정벌레목에 속한 곤충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대고 누워 있었다. 머리를 약간 쳐들어보니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가 보였고 그 배는 다시 활 모양으로 흰 각질의 칸들로 나뉘어 있었다. 이불은 금방이라도 주르륵 미끄러져 내릴 듯 둥그런 언덕 같은 배 위에 가까스로 덮여 있었다. 몸뚱이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은 애처롭게 버둥거리며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출장 영업사원인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평범한 아침. 세상은 변함없지만, 자신에게는 어마어마한 변화가 생겼다. 이토록 황당한 변신이라니. ‘황당하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거나 현실성이 없어 어찌할 도리가 없을 정도로 어이없고 터무니없다.’이니 지금 주인공의 상황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 누군가는 거미에 물려 도시를 구하는 영웅이 되는데 누군가는 하루아침에 이유도 알 수 없는 벌레가 되었다. 거미 인간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벌레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딱히 없다. 현실에서 인간의 운명이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이토록 기막히고 황당한 작품이 바로 사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라고 평가받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다.      


 카프카는 1883년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당시 프라하는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제국 보헤미아 지역으로 그는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 사회에서 성장하였다. 카프카는 프라하에 있는 보험공사에서 은퇴할 때까지 일한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세계적인 작가라는 명성에서 볼 때 오히려 평범한 삶에 독특하다는 수식어가 붙는다. 아무튼, 평범한 직장인으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을 동시에 살았는데, 유대계 독일이라는 독특한 환경으로 인해 늘 고독과 외로움을 안고 지냈으며 이는 고스란히 그의 작품에 투영되었다. 폐결핵을 진단받고 빈의 한 요양원에서 사망(1924년)했는데, 이미 발표한 작품은 남겨두고 마무리할 수 없었던 작품들은 모두 불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유언을 성실하게 집행하지 않은 친구이자 편집자인 막스 브로트 덕분에 ‘고독 삼부작’을 비롯한 그의 많은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카프카의 작품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변신>만 봐도 알 수 있다. 작품의 도입부터 불편하고 불친절하다. 아무런 설명이나 원인도 없다. 그저 꿈이려니 단정해버리는 게 마음 편하지만, 그런 안일한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황당한 사건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작품을 읽는 내내 무언가 설명을 기대하지만 결국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아무런 실마리도 설명도 없다. 인내심 많은 독자라면 벌레가 된 주인공의 시점으로 작품을 따라갈 테지만, 그렇지 않으면 당장 책을 덮어버릴지도 모른다. 내 경우, 책의 두께가 얇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해 가볍게 읽으리라 기대했는데 몇 번이나 포기하고 책을 그냥 덮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책을 손에 잡은 이유는 하나였다. 벌레가 된 주인공을 작가가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하는지 마치 스스로가 벌레가 되어본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벌레를 의인화한 것이 아니라, 벌레의 시점에서 묘사했다. 수십 개의 다리를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 벌레의 생각을 두 개의 다리만 사용하는 인간이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 어려운 걸 카프카는 해냈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변신>을 읽게 한 동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주인공이 벌레가 되었다는 황당한 사건을 제외하면, <변신>의 줄거리는 의외로 간단한다. 주인공에 기대에 생활하는 가족 (부모님과 여동생)이 벌레가 된 주인공을 대하는 과정의 변화가 이 작품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는 주인공이 벌레가 되면서 당연히 경제력을 상실하고 집안에서의 지위도 상실하게 된다. 반면 사업 실패 후 무기력하던 아버지는 (아들이 벌레가 된 덕분에) 새로운 직장을 찾고 아울러 아버지로서 제자리(위엄)를 되찾는다. 오직 사랑으로 주인공을 대하던 어머니와 여동생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아들이자 오빠로서가 아니라 점점 벌레 자체로 그를 받아들인다. 결국 주인공은 (가족의 냉대와 무관심에도) 공허하고 평화로운 생각에 빠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주인공을 잃은 가족은 다시 예전의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게 된다. 작품은 아래와 같이 끝을 맺는다.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하니까. 


 "잠자 씨 부부는 점점 생기가 도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가 최근에 두 볼이 창백해질 정도로 갖은 고생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탐스러운 처녀로 피어났다는 것을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느꼈다. 부부는 점점 말수가 적어지더니 거의 무의식적으로 눈길로 대화를 나무며 이제는 슬슬 딸에게 착실한 신랑감도 구해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목적지에 이르자 딸이 제일 먼저 일어나 젊은 몸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을 때, 그들에게는 그 모습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의 보증처럼 여겨졌다."


 <변신>은 현대인의 실존적 위기를 상징하는 현대적 우화이기도 하다. 신자본주의가 전 지구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경제력을 상실한 인간이 벌레와 같은 존재로 전락하다 끝내는 소멸해 버린다는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물론 정반대의 해석 (벌레가 현실로부터의 탈출이라는)도 가능하다. 이 작품이 쓰인 지 백 년이 훌쩍 지났다. 인간에게 거대한 사회라는 기계의 작은 부품이 되기를 요구하다 이제는 부품으로써의 인간도 필요 없는 시대로 향하고 있다. 물론 아직 결정은 인간에게 달려 있다. 마지막 선택권을 행사해야 하는 결코 길지 않은 시간만 남은 지금, 카프카의 <변신>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지 가만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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