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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17. 2020

소설 앞에 선 독자의 불안

고전의 재味발견 :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표지 그림은 미술 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절규>다. 노르웨이 표현주의 화가 뭉크의 작품으로 깊은 절망(좌절)에 빠진 사람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배경과 인물을 강렬하게 왜곡했다. 미술을 몰라도, 그림을 몰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작품이다. <절규>를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표지로 사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의 센스는 십 점 만점에 십 일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 편집자의 아이디어였으리라 예상되는데 두 작품은 정말 완벽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왜냐고? 소설을 읽은 후 내 얼굴이 <절규>에 나온 인물의 얼굴과 별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편집자 역시 이 작품을 읽으며 같은 표정을 지었으리라 조심스레 예측해 본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독자를 불안에 빠뜨리는 참 불편한 작품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90년대 학번에는 암묵적으로 꼭 봐야 할 영화들이 있었다. 영화사의 변곡점마다 등장했던 기념비적인 작품들이었다. 이제는 오래되어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예를 들어 전함 포템킨이나 파업, 400번의 구타, 모던 타임즈 그리고 아리랑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목록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영화가 있었으니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였다. '형사 콜롬보'로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 피터 폴크가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한 작품이다. 풋풋했던 20대 초반의 나도 한창 영화감독을 꿈꿀 때라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본 기억이 있다. 지금도 천사 다미엘이 인간 세계(베를린)를 지긋이 내려보는 장면이 가끔 생각난다. 


 80년대 유럽 영화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베를린 천사의 시>를 빔 벤더스 감독과 공동으로 집필한 작가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의 저자인 페터 한트케다. <베를린 천사의 시>도 한번 보고 고개를 끄덕일만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에 비하면 무척이나 관객(독자) 친화적인 작품이라 할만했다. 도저히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두 작품이 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에 무척 당황했다. <관객 모독> 역시 같은 작가라는 사실과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정말 놀랐다.


"이전에 꽤 유명한 골키퍼였던 요제프 블로흐는 건축 공사장에서 조립공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일하러 가서는 자신이 해고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의 위대한 첫 문장이다. 공사장에서 해고되는 주인공의 불행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렇지만 정작 해고 자체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훨씬 오래전부터 그만둘 구실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늘일 뿐이다. 이런 혐의(?)를 더욱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은 실제로 주인공을 해고시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현장감독의 눈빛을 해고 통지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한때 유명했던 골키퍼로서의 자신과 공사장에서 일하는 조립공으로서의 자신, 자아의 불일치 또는 정체성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는 주인공의 방황은 즉흥적이고 무작위적이다. 계획이 없다. 


 통상 '줄거리 없는 소설'이라는 한트케의 작품 중, 전통적인 서사를 회복하는 시발점이 되는 작품, 어디를 봐서 그렇다는 것인지 끝내 이해하지 못한 1인입니다만,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 역시 줄거리(서사)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간의 괴리가 무척이나 크기 때문이다. 이는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를 지속적으로 낯설고 불안하게 만든다. 한트케의 작품이 처음인 나로서는 그 과정이 몹시 힘들었다. 같은 구절을 몇 번씩 반복해서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태반이었다. 독서를 할 때는 상상의 영역과 사고의 영역을 자유롭게 오고 가야 하는데 그 길이 꽉 막힌 느낌이었다. 현기증이나 멀미 같은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작품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아주 현실적인 이유였다. 책이 아주 얇다는 것. (이 책을 읽어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이기도 하지만 결국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작품 전반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주인공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의 결말에 도달하리라는 작은 희망도 한 몫했다. 결과는?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멋진 옷을 차려입으시고 집을 나설 때 데려가 달라고 떼를 쓰며 운 적이 있다. 부모님은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며 끝내 나만 두고 외출하셨다. 그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작가는 주인공 손을 잡고 소설의 마지막 장을 떠나버렸는데 독자인 나는 아직 마지막 장에 머물러 있는 그런 느낌 말이다. 사실 그 장이 마지막 장인지 아닌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느낀 불안감은 그렇게 일종의 배신감과 허탈함으로 마무리되었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기존 소설 문법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참 힘들고 어려운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저요!) 소설의 전개 자체가 현대인의 소외와 단절을 의미한다는 해석(또는 해설)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볼 만한 작품이기도 하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독자에게 "드루와, 드루와" 하며 손짓을 하고 있다. 그 엘리베이터 안에 타는 것은 독자인 여러분의 몫이다. 나는 두 번은 타지 못할 듯 하지만, 여러분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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