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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Nov 09. 2020

형이 왜 거기서 나와?

고전의 재味발견 : 금오신화 (김시습)

 누구에게나 인생영화 한 편쯤은 있다. 내게는 그런 작품이 좀 많은 편이지만, 나를 영화의 매력으로 끌어들인 작품을 딱 하나만 말해보라고 하면 주저 없이 <천녀유혼>을 지목할 것이다. 순수미청년 장국영,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귀신 왕조현이라는 매력적인 두 인물과 엄청난 스케일의 특수촬영 (지금 보면 조악하기 그지없지만), 우마 형님의 화려한 액션은 당시 중학생인 내게 세상에 없는 판타지를 선사해 주었다. <천녀유혼>은 <영웅본색>과 함께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홍콩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루는 한가운데 서 있었다. 당시 비디오 가게(대여점) 한 칸을 가득 채웠던 홍콩영화 코너에서 안 본 영화가 없을 만큼 그렇게 홍콩영화는 시골소년의 전부가 되었다. 그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장국영과 왕조현 >

 <천녀유혼>의 소재는 '인간과 귀신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지금 보니 영화 포스터에 해당 문구가 떡하니 쓰여 있다). 살인과 범죄로 혼란한 중국의 어느 시대, 말단 공무원인 영채신(장국영)은 늑대도 무서워 피하는 난약사라는 오래된 절에서 억울하게 죽은 귀신 섭소천 (왕조현)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섭소천은 천년 묵은 나무귀신에게 종속된 귀신이고, 게다가 며칠 후면 지옥의 흑산 대왕에게 원하지 않는 시집을 가야 할 상황이다. 영채신은 난약사에 숨어 사는 무림 절대고수 연적하 (우마)에게 도움을 청하고, 인간에게 배신당해 남은 애정이라곤 1도 없는 연적하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영채신과 섭소천의 서로를 향한 마음에 감동해 그들을 돕는다. 결국 갖은 고생 끝에 지옥에서 도망쳐 나온 세 사람은 어스름 새벽녘이 되어 난약사로 돌아오고 환생을 위한 마지막 순간을 놓칠 수 없었던 섭소천은 영채신에게 안녕이라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역대 최고의 엔딩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려온다...)

 갑자기 오래된 영화 <천녀유혼>이 떠오른 계기가 있다. 우리 고전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읽을 때였다. 고전 읽기를 하면서 우리 문학도 한두 편은 읽어보리라 다짐했는데 내내 미루다가 작정하고 고른 책이 금오신화였다. (작품 선택의 기준은 절대 아니지만) 얇은 책 두께도 한몫했다. '괴기, 애정 등을 내용으로 하며, 문어로 쓰인 설화와 소설의 중간 단계에 있는 문학 양식'이라는 전기체(傳奇體) 소설의 효시라고만 알고 있던 금오신화에 대해서는 사실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 '전기'라는 단어도 이 책을 읽으며 사전을 찾아볼 정도였으니. 총 다섯 편으로 구성된 작품 중 첫 편인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를 읽고 <천녀유혼>이 생각났다. 설마 정소동 감독이 금오신화를 읽었나 착각할 정도로 두 작품은 매우 유사했다. 


 만복사에 홀로 기거하는 양생은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부처님과 저포놀이(윷놀이)를 해 이기게 되고, 배필을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부처님이 양생의 소원을 들어주셨는지 단아하고 기품 있는 여인이 몸종에게 심부름시켜 만나기를 청한다. 둘은 시를 주고받으며 정을 나누고 달콤한 한 때를 즐기지만 이내 여인은 자신이 전쟁통에 죽은 불쌍한 신세임을 밝히게 된다. 결국 여인은 먼 나라에서 환생해 작별하게 되고, 양생은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채 평생 홀로 살아가게 된다. 이야기 설정 자체도 매우 유사하지만, 만복사저포기를 읽다 보면 천녀유혼 영화 장면이 연상되는 구절이 매우 많았다. 내 10대를 황홀경에 빠지게 했던 <천녀유혼>이 우리 고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니! 왠지 마음이 뿌듯했다. 우리나라 최고???


 물론 나만의 착각이었다. 혹시나 하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천녀유혼>은 중국 8대 기서 중 하나인 <요재지이寥齋志異> 제2권  <섭소천> 편을 원작으로 했다. 청나라 때 작가 포승령의 작품이다. 요괴, 신선, 귀신, 여우가 등장하는 기괴한 이야기가 500편 이상 정리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 여우가 등장하는 이야기와 귀신과 인간이 정(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가 많다고. 요재지이는 명나라 때 작품 <전등신화>와 같은 계통에 속하지만, 민간에 구전되는 이야기를 그대로 채록하지 않고 작가가 분명한 창작 의도를 가지고 집필한 작품이라고 한다. 명나라 구우가 집필한 전기소설집 <전등신화>는 <금오신화>가 나오면 항상 언급되는 작품이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나 소재의 유사성 등을 고려할 때 <금오신화>가 <전등신화>의 모방작이라는 평가가 나올 만도 하다. 하지만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단순하게 모방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지에는 의문이 따른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당시의 문화, 사상, 감정 등을 표현한 <금오신화>가 독자적인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음은 분명하다. 


 작품의 제목이 <금오신화>이 이지만 신화(新話)이지, 신화(神話)가 아니다.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김시습이 경주 금오산에 있는 용장사에 7년 간 은거하며 지은 새로운 이야기라 하여 금오신화(金鰲新話)라고 이름 붙였다. 현재는 5편이 수록되어 있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금오신화는 1884년 일본 동경에서 간행된 목판본을 1927년 최남선이 소개한 것인데, 하권 말미에 '갑집'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5편 이상이 될 것이라고 유추하는 것이다. (갑을병정... 이렇게 쭉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나머지 4편은 '이생이 담 너머를 엿보다'는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부벽정에서 취하여 놀다'는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에 가다'는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잔치에 초대받다'는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이다. 각 편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야기도 워낙 짧고 재미있어 직접 읽어보면 좋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인용한 한시(서정시)가 무척이나 많고, 갈등구조가 약하다거나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 남녀라는 비현실성 등 단점도 있지만 오래된 옛날이야기를 할머니로부터 듣는다고 생각하면 기꺼이 참을만한 요소이다. 깊어가는 가을밤 구운 밤을 까먹으며 할머니 곁에 바짝 앉아 듣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그 이야기 말이다. 


 <금오신화>는 개인적으로는 한때 10대의 전부였던 <천녀유혼>을 회상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작품이다. 너무 좋아했던 배우 장국영을 소환해 주었다.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나간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배우 장국영! 그렇게라도 옛사람과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마주할 수 없는 두 세계에서 만난 인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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