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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Nov 10. 2020

Como agua para chocolate

고전의 재味발견 :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어! 이 영화가 원래 원작이 있는 작품이었어?"


 나름 독서를 좋아하고 책을 늘 가까이한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정수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띵~~~ 할 때가 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양철북>,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같은 영화의 원작을 우연히 만나게 될 때다. 영화의 명성과는 별개로 개인 취향이 아닌 탓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도 했거니와 아주 오래전 영화라 모를 법도 하지... 하며 아무도 듣지 않는 변명을 늘어놓게 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1957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1977년, 양철북은 1988년 국내에서 개봉했다.) 

 몇 달 전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발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은 비교적 최신작이라 충격이 더 컸다. 영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대학 새내기 시절인 1993년에 개봉했다. 치열한 입시에서 해방된 나는 매일 술을 마시고 노느라... 가 아니고, 도서관에서 죽도록 공부만 하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왠지 이 영화에 대해서는 마치 본 것처럼 익숙했다. 영화광이었던 친구에게서 들었거나 한동안 열심히 읽었던 영화잡지를 (키노, 씨네 21 등) 통해서 정보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단, 이 영화 역시 소설이 원작이었음은 전혀 몰랐다. 그렇게 우연히 발견한 원작 소설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이틀 만에 읽어 내려갔다.   


 이 작품은 멕시코 작가 라우라 에스키벨이 1989년 발표한 작품이다.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던 그녀는 이 작품을 원래 영화 시나리오로 구상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소설로 발표하게 되었다. 소설은 큰 인기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1992년 영화화되었다.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사람이 (지금은 아니지만) 그녀의 남편 알폰소 아라우 감독이다.


 이 작품은 엄청난 흡입력을 지녔다.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주인공 티타의 사랑과 음식에 대한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와 함께 삶의 희로애락을 공유하게 된다. 작품에 등장하는 열두 가지 멕시코 전통 음식은 단순한 소재에 머무르지 않고 차벨라 웨딩 케이크를 감싸고 있는 크림처럼 그대로 서사에 녹아 있다. '요리 문학'이라는 새로운 페미니즘 문학 장르가 탄생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원작의 제목 <Como agua para chocolate>을 번역하면 '초콜릿 물처럼'다. 영화의 영어 제목도 <Like Water for Chocolate>이다. 언어와 문화가 달라서 그런가 제목이 잘 와 닿지 않았다. '마술적 리얼리즘' 혹은 '어른을 위한 성적, 미각적 판타지' 또는 '요리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이라는 칭찬 일색의 내용과는 다르게 제목에서 뭔가 심심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반해 우리말 제목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정말 훌륭했다. 어느 분의 작명 센스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대단한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원제뿐만 아니라 작품의 정서도 고스란히 녹아있다고나 할까? 작품을 완독하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원제인 Como agua para choclate는 초콜릿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심리 상태나 상황을 의미한다고 한다. 작품의 내용 및 정서와 일맥상통한다. 작가(또는 편집자)가 붙인 제목이 어련할까. 왜 평생 공부를 하고, 책을 읽어야 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이 작품의 첫 문장은 크리스마스 파이를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는데 마치 마법사의 주문 같다. 혹시 양파를 자주 다듬는 분들을 위해 소개해 본다. 효과가 있다면 댓글로 공유해 주셔도 좋겠다. 


 "양파는 아주 곱게 다진다. 양파를 다지면서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다면 자그마한 양파 조각을 머리 위에 얹는다. 양파를 다질 때 눈물이 나오면 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게 그러니까, 한번 눈물이 나왔다 하면 양파를 다지는 동안 내내 울음을 멈출 수 없다는 게 영 안 좋다. 여러분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그랬다. 수도 없이 울었다. 엄마는 내가 양파에 민감한 건 티타 이모할머니를 닮은 거라고 했다." 


 데 라 가르사 집안의 막내딸 티타는 가문의 고약한 전통 때문에 평생 결혼을 하지 못하고 어머니 (마마 엘레나)를 부양해야 한다. 부당한 전통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가문의 전통이라는 멍에와 가부장적인 (폭력적인) 마마 엘레나로 인해 복종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티타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페드로)가 있다. 게다가 페드로가 청혼하기 위해 그녀들의 농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마마 엘레나는 가문의 전통을 따라야 한다며 페드로의 청혼을 거절하고, 그 대신 티타의 언니 로사우라와의 결혼하라는 황당한 제안을 한다. 순정남 페드로는 로사우라와 결혼함으로써 평생을 티타 곁에 머무를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 하나만으로 결혼을 승낙한다. (둘이 함께 도망가자고 했으면 티타도 동의했을 텐데...) 20여 년 후 두 사람의 사랑은 결국 맺어지지만, 그 시간 동안 티타는 삶의 의미를 잃고 가시밭 길을 걷는다. 형부가 된 페드로와의 관계를 여전히 의심하는 마마 엘레나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하는가 하면, 부엌에서 티타를 친자식처럼 키워주고 요리라는 세상에 눈을 뜨게 해 준 보모 나차도 잃는다. 자신이 직접 젖을 물려 키운 조카 (페드로와 로사우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잃고는 말대꾸 한번 제대로 못했던 마마 엘레나에게 대들다 심하게 맞고 일종의 정신병을 겪기도 한다. 물론 그녀 곁에서 언제나 따뜻하게 감싸주는 인물 존 박사와 티타가 만든 장미 꽃잎을 곁들인 메추리 요리를 먹고 성적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거리로 뛰쳐나가 혁명군 장군이 된 헤르트루디스 언니가 있었지만 그녀의 아픔과 슬픔을 대신해 줄 수는 없었다. 티타에게 남은 건 친엄마와 같았던 나차가 전수해준 가문의 전통 요리와 그 요리를 먹고 행복해하는 사람밖에 없었다. 


 티타의 요리에는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그녀가 즐거울 때 만든 음식은 최상의 맛을 자랑하기도 하지만 먹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과 행복을 느끼게 한다. 반면 그녀가 우울하고 속상할 때 만든 음식은 맛도 미묘하지만 먹은 사람에게 우울감과 슬픔, 그리고 복통과 설사까지 일으킨다. 페드로와 로사우라 언니의 결혼식에 쓰인 차벨라 웨딩 케이크 편을 보면, 온통 슬픔과 비탄에 빠져 만든 웨딩 케이크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뿜어져 나오는 설사를 참을 수 없게 되어 결혼식장과 거리를 온통 분뇨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녀의 언니 역시 같은 증상을 겪어 신혼 첫날밤을 몇 개월 후로 미뤄야 했다. 한편 페드로에게 결혼의 숨은 의미를 직접 듣고, 장미꽃을 선물 받은 티타는 끝없는 환희와 사랑에 휩싸여 메추리 요리를 만들게 되고 그 요리를 먹은 가족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뜨거움을 느낀다. 마마 엘레나는 몸을 식히기 위해 샤워를 하다 샤워실에 불을 내고, 언니 헤르트루디스에게는 최음제가 되어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집을 뛰쳐나가 혁명군 장교와 사랑을 나누게 한다. 가문의 마지막 요리 계승자 티타의 음식은 언제나 마법 같은 일들을 만들어 낸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행복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죽음이지만 티타는 더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페드로와의 마지막 순간, 그녀는 오직 사랑만을 느꼈다. 티타는 주어진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불합리한 전통에 대항해, 불평등에 대항해, 자신의 사랑과 행복을 찾기 위해 싸웠다. 그녀의 전쟁터는 부엌이었고 요리가 무기였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승리했다. 


 "티타는 책상 서랍에서 존이 선물했던 성냥갑을 꺼냈다. 몸 안에 많은 성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티타는 성냥갑 안에 들어 있던 성냥들을 하나씩 집어삼켰다. 티타는 성냥을 한 개비씩 씹을 때마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페드로와 함께했던 가장 격렬한 순간을 떠올려보려고 했다. 페드로에게서 처음으로 뜨거운 눈길을 받았을 때, 처음으로 손길이 스쳤을 때, 처음으로 장미 꽃다발을 선물 받았을 때, 첫 키스를 나누었을 때, 처음으로 애무했을 때, 처음으로 뜨거운 관계를 가졌을 때를 떠올렸다. 티타는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그녀가 씹고 있던 인과 격렬했던 추억이 부딪히자 드디어 성냥에 불이 붙었던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시야가 밝아오면서 터널이 다시 그녀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터널 입구에서는 페드로가 환한 광채에 휩싸인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티타는 주저하지 않았다. 페드로에게 달려가 긴 포옹을 나누고 한참 동안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다시 절정에 오른 사랑을 느끼며 잃어버린 에덴을 향해 함께 떠났다.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티타와 페드로의 죽음으로 한 시대는 끝이 났다. 농장도 불타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가 진정으로 아낀 둘째 조카 에스페란사(티타는 조카가 자신처럼 말도 안 되는 가문의 전통에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결국 목표를 이루었다)가 그녀의 딸을 위해 만든 맛있는 크리스마스 파이와 함께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소개된 열 두 개의 멕시코 전통 요리 중 하나쯤은 만들어 보고 싶다는 충동에 빠진다. (정확히는 열한 가지다. 하나는 성냥 반죽이다) 사랑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깊어 가는 가을에 왠지 모를 고독감에 싸인 분들도 읽어 보면 좋다. 지금 사랑하고 있다면 꼭 읽어 보아야 한다. 지금 사랑하지 않고 있어도 읽어보면 좋겠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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