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랑한다고 말해요

원조 울보. 할머니 곁에 살다 멀리 독일 땅에 정착한 둘째 외손녀

by 조이홍

할머니 댁에는 보물창고가 있다. 안 쓰는 작은방과 부엌 곁의 곳간에서 늘 한가득 할머니 사랑이 담겨 나왔다. 이미 나올 만큼 다 나왔다고 생각해도 끝없는 할머니 사랑은 마르지 않는 우물과도 같았다. 계절에 따라 사랑의 열매도 다양하다. 고구마와 옥수수를 좋아하는 집에는 한 소쿠리 가득 고구마와 옥수수가 담기고, 정성으로 만든 된장이 담기기도, 손수 빚은 김치 만두가 담기기도 했다. 가끔 할머니 상추 수확 속도를 따라 상추를 다 먹기가 어려울 때도 있었다. 할머니 상추는 유독 잘 자랐다.


아래 위층 살며 할머니가 사랑을 나누시려고, 어떤 날씨에 얼마나 시간을 드려 준비하셨는지 직접 보았다. 그렇게 담겨 나오는 것들이 그냥 고구마, 그냥 옥수수, 그냥 상추가 아님을 잘 알았다. 온종일 땡볕 아래서 굽은 허리를 좀처럼 펴지 않고 자식 입에, 손주 입에 들어갈 그것들을 정성껏 보살폈다. 젊은 사람들도 병이 날 정도로 강도 높은 노동이었다. 부디 다음 해에는 농사짓지 말라고 말씀드려도 할머니는 결코 멈추지 않으셨다. 겨울에는 식물이 자라지 않으니 좀 쉬시겠지 했지만 웬걸! 밤늦도록 속이 꽉 찬 김치 만두 빚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모든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지만, 멀리 독일에서 살며 얼마 안 되는 텃밭을 직접 가꿔보니 할머니 생각이 절로 났다. 가끔 영상통화라도 하면 할머니한테 텃밭 자랑과 할머니 비결을 배우고자 열심이다. 할머니는 그 많은 것들을 어찌 그리 잘도 길러내셨을까? 단출한 두 식구 먹을 것을 길러내기도 이토록 어려운데 할머니가 그 너른 텃밭에서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텃밭에서 기른 사랑의 열매들은 모두 자식들, 손주들 몫이었다. 정작 할머니 몫은 없었다. 결코 당연하지 않은 일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할머니는 6남매에 첫 손녀 원뚱 언니부터 이제는 몇 명인지 세기도 힘든 손주들 그리고 뒤이어 꼬물이 같은 증손주들까지 마음으로 몸으로 품어 길러내셨다. 한 줄로 세워 놓으면 끝이 안 보일 지경이다. 그 세월 동안 할머니는 도대체 몇 번이나 마음을 쓸어내리셨을까? 감히 나는 짐작조차 못 하겠다.


할머니와 가까이 살다 보니 의도치 않게 많은 순간을 함께 했다. 자식 걱정, 손주들 걱정에 눈물 훔치시던 할머니, 울보 손녀 때문에 진땀 빼던 할머니, 호흡기 약한 손자 먹이려고 호두며 은행을 구해와 먹이시던 할머니 등등 하나하나 나열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할머니 시간을 행복으로만 채워 드리면 좋은데,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최근에 나도 할머니 가슴을 아프게 해 드렸다. 품에 안아보지도 못했던 아기를 떠나보내고 아파할 때 엄마 가슴에 눈물이 났고, 그 딸의 눈물에 할머니는 피눈물을 흘리셨다. 게다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 원대로 챙겨 주지 못해 두 분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잠시나마 느낀 엄마라는 마음을 통해 길러내는 것이 쉬이 하는 일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우리 할머니 가슴에, 그분의 인생에는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우리가 담겨 있다. 누구 하나 온전히 자신을 받치지 않고 쉬이 길러내지 않으셨다. 그렇게 할머니의 지난 시간을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 전부를 길러내고 품어 내는 것으로 꾸려오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할머니 인생 후반전은 어떠할까?


내 바람이라면 이전처럼 자식, 손주에게 오롯이 자신의 삶을, 시간을 희생하시지 않으시면 좋겠다. 할머니의 여생을 당신이 길러낸 우리를 통해 채워가셨으면 좋겠다. 길러내신 것들을 세상에 내놓으셨고 나누셨으니, 이제는 우리들과 함께 오래도록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또한 할머니 삶의 후반기가 우리 노력으로부터 더욱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가족 모두가 알아주면 좋겠다. 무슨 거창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할머니 하루에 웃음과 이야깃거리들, 그리고 사소한 소식일지라도 함께 공유하며 할머니의 하루를 채워드리자는 것이다. 나도 지금껏 표현하지 못했지만, 할머니를 사랑하는 마음도 겉으로 표현했으면 좋겠다. 나도 참 부족하게도 처음으로 먼 독일에 와서야 할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전화 넘어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했다. 가까이서 얼굴 보며 왜 자주 전하지 못했을까? 사랑 표현을 할 때, 생각보다 우리 할머니 그리고 할아버지도 사랑 표현을 너무 잘해주셨다. “나도 우리 외손녀 많이 사랑한단다.” 우리 할머니가, 그리고 할아버지가 정말 자연스럽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할머니 마음속에 그렇게 우리는 큰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어느 것 하나 쉬이 길러낸 것이 없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할머니의 사랑을 하루하루 꾸며 드릴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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