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의 소설) 너와 나의 연애소설
지민 몰래 반차를 내고 일찍 회사를 나온 준규는 동네 시장에 들렀다. 요리라고 하면 자기가 먹을 라면 정도만 끓여본 경험이 있는 그가 지민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화해했다. 누가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꺼냈는지 기억도 하지 못했다.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스스로 마음속에 쌓아둔 성벽을 무너뜨리고 상대방과 마주했다. 화해를 위한 요란한 의식 따위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같은 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게 신기했다. 하늘에서 맺어준 인연이라며 준규가 너스레를 떨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웃었다.
준규는 지난 설에 지민이 유난히 잘 먹던 몇 가지 음식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 필요한 정보는 모두 인터넷 안에 있었다. 회사에서 선배들 눈을 피해 틈틈이 요리법을 확인했다. 알듯 모를 듯 한 부분은 어머니께 전화해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신세대 아들이라며 타박하셨지만, 이내 며느리가 부럽다는 말과 함께 당신만의 비법을 조곤조곤 일러 주었다. 확실히 글로 보는 것보다 어머니의 설명이 쏙쏙 이해되었다. 그는 다음 어머니 생신상은 자신이 직접 차려드리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어머니는 며느리 덕분에 아들한테 생일상 받게 생겼다고 좋아하셨다. 시장에서 사 온 재료들과 요리법을 프린트해 온 A4 용지를 너저분하게 펼쳐놓고 그의 인생 첫 번째 요리가 시작되었다. 과정 하나하나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왠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게 다 뭐야? 오빠가 만들었어?”
지민의 큰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오래전 그날,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의 가슴에 새겨졌던 크고 맑은 그 눈이었다. 얼굴에 피어오르는 미소는 활짝 핀 벚꽃 같았다. 준규가 처음 만든 음식이라 맛이야 안 봐도 뻔했지만, 지민은 진심으로 맛있게 먹었다. 그는 음식 만들면서 워낙 간을 많이 봐 배가 불러 못 먹는 것이었지만,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지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고 생각했다.
“밥 다 먹으면 우리 오랜만에 동네 산책하러 갈까?”
결혼은 사랑이 반드시 도달해야 할 종착지가 아니다. 다양한 선택지 중 하나가 결혼일 뿐이다. 준규와 지민은 서로 사랑했고 결혼이란 선택을 했다. 비로소 두 사람은 연애(戀愛)의 지향점을 찾아 함께 떠날 준비가 되었다. 지금까지 여정에서 탑승권은 사랑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 올 여행에서 그 탑승권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걱정은 하지 않았다. 또 다른 탑승권이 필요하면 잠깐 정차하면 그만이었다. 길고 긴 삶의 여정에 잠시 쉬어가는 간이역도 필요할 터였다. 또한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갈수록 비워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비워낸 자리를 무언가로 채워 넣으려고 억지로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비워진 것은 그대로 두면 그만이다. 두 사람이 함께라는 사실에는 변함없을 테니까. 지민과 준규는 서로의 옆 자리를 넉넉하게 비워 두었다.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다 보면 어디에 이르게 될지 궁금했다. 두 사람이 세 사람으로, 또는 네 사람으로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또 한 번 상상도 해보지 못한 세계와 맞닥뜨리게 될 터였다.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두 사람은 함께 걸으리라.
계절은 돌고 돌아 뜨거운 여름의 끝으로 달려갔다. 노랑 옷을 입은 둥근달이 그림책 주인공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인도했다. 후추처럼 흩뿌려진 이름 모를 별들은 애써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기는 엄마 품에 안겨 잠이든 아기의 숨결처럼 포근했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한여름 밤 열기가 싫지 않았다. 자연이 보내는 여름의 작별 인사는 서운한 절정에 다다랐다. 오랜만에 손을 꼭 잡고 동네 산책을 나선 준규와 지민은 자신들이 사는 동네에 이렇게 예쁜 골목길들이 많다는 걸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매일 출퇴근하며 정신없이 걷던 길을 천천히 걷다 보니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밀린 이야기들을 하면서 동네 구석구석까지 발길이 닿았다.
“나오니까 좋다. 나, 스타 크래프트 삭제했어. 게임 그만하려고. 일찍 퇴근하는 날은 이렇게 함께 산책하자.”
“나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어. 하고 싶으면 해. 그 대신 너무 오래 하지는 말고."
"아니야, 이제 재미도 없는 걸."
"그럼 우리 한 달에 한 번 부부의 날로 지정하는 건 어때? 그날은 눈치 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기로. 게임하고 싶으면 게임하고, 늦잠 자고 싶으면 늦잠 자는 거야. 어때?”
“좋은 생각인데! 그럼 난 일찍 일어나서 아침밥 준비할래. 너를 위해서….”
“노노. 오빠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날로 만들어요. 나도 그럴 거니까.”
“음, 좋아. 참, 갑자기 생각났는데 우리 사귀기 전에 일요일 아침에 전화해서 내 생일 물어봤잖아. 그거 왜 물어본 거야?”
“언제…. 아, 그거! 친구들이랑 신내림 받은 용하다는 점집에 갔다가 재미 삼아 내 운명을 물어봤지. 인연이 누가 될지 궁금해서….”
"네가 점을?"
지민이 웃었다. 준규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동네를 한참 동안 걸었다. (끝)
주말에만 연재했던 '너와 나의 연애소설' 마지막 편입니다.
그림은 아내가 그린 <저녁이 있는 풍경>입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