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 칼로 물을 베었다

(주말의 소설) 너와 나의 연애소설

by 조이홍

준규는 장인어른 생신에 조니 워커 블루 (Johnnie Walker Blue) 한 병을 사 들고 갔다. 아직 지민은 도착하지 않았다. 일이 늦어질 것 같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식사하라고 장모님이 일러주셨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불화를 부모님께 알리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마음이 통했다. 대화하면 몇 마디 되지 않을 내용을 문자로 10분 넘도록 주고받았다. 여전히 상대방의 의도보다 자신의 감정을 대입해 텍스트를 읽었다. 아무튼,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기로 약속했는데 지민이 아직 오지 않았다. 준규는 차라리 그녀의 부재가 반가웠다. 잠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궁금했다. 장모님께 슬며시 여쭤보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급한 일이 생겨 퇴근이 미뤄지는 건 직장인에게 흔한 일이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해야 준규 마음도 편했다.


장인은 준규가 선물한 위스키를 온더록스 두 잔에 가득 부었다. 오랜만에 사위와 갖는 술자리가 행복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관계 중 하나인 장인과 사위의 대작(對酌)이 시작되었다. 애주가 장인은 술이 아주 셌다. 당신도 주량을 모른다고 했다. 그런 장인이 오늘은 하나밖에 없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소중한 딸을 훔쳐 간 사위와 기분 좋게 취했다. 700mL 위스키 한 병이 금세 비었고, 소주도 벌써 세 병째 비웠다. 준규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이야깃거리가 떨어져 보는 사람도 없이 켜져 있던 TV 뉴스에 귀 기울이던 준규는 장인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장인이 울고 계신 게 아닌가!


“지민이 남자한테는 영 관심이 없어 걱정했는데 자네를 만나 다행이네. 딸자식 하나라 애지중지 키워 자기밖에 몰라. 자네가 잘 다독이면서 예뻐해 줘. 처음 지민이 자네 이야기를 꺼냈을 때 왜 자네와 교제하기로 했는지 물어봤네. 그때 우리 딸이 뭐라고 했는지 아나? 아빠를 똑같이 닮았다는 거야. 지 아빠 기분 좋아지라고 한 말이겠지만, 그 말을 들으니 얼굴도 모르는 자네가 마음에 들더군. 그리고는 슬그머니 문자 한 통을 보여주며 자랑하더라고….”


흠뻑 취한 준규도 지민이 장인께 어떤 문자를 보여드렸을지 짐작했다. 그저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그때, 자신이 아니어도 지민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그때를 어렵지 않게 기억해 냈다. 준규가 스스로에게 내린 망각이라는 벌을 받고 깊은 침묵의 땅속에 묻어 두었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준규는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다른 사람인지 헤아려 보았다. 늘 지민의 옆자리에, 항상 같은 자리에 있으리라 다짐했는데 무엇이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는가? 그 순간 마음속에 쌓아 둔 단단한 성벽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준규는 가슴 한편이 뜨겁게 아려옴을 느꼈다. 마음이 아프다는 따위의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처럼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통증이었다. 얼른 팔을 뻗어 옆에 있는 물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술에 취한 장인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준규는 재빨리 일어나 장인을 부축하려 했지만, 장모님이 그를 말렸다. 그 정도 마시고 어찌 될 장인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며 지그시 손을 흔드셨다.


“자네 장인이 딸 사랑이 끔찍해. 어떻게 자네한테 시집보냈는지 몰라. 결혼 초에 내가 그렇게 담배 좀 끊으라고 해도 듣는 척을 안 하더니 딸이 태어나니까 그날로 끊지 뭐야. 지민 고것이 성격이 좀 깔끔해? 어릴 때 지 아빠가 화장실에서 볼일보다 좀 튀니까 지저분하다고 자기처럼 앉아서 일 보라고 하는 거야. 택도 없는 소리였지. 근데 자네 장인이 어떻게 했는 줄 아나? 자네 장인은 지금도 앉아서 볼일 보네. 참 대단한 부녀야.”


준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저 지민은 지저분한 건 못 참는 사람일 뿐이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빙빙 돌리지 않고 상대를 향해 곧고 날카롭게 말해 종종 의도와 다르게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 말에 어떤 함의를 담아 상대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날 준규를 향했던 칼날은 그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생겨난 것임을 깨달았다. 그 칼날로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민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준규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왜 그토록 지민과 삐뚤어진 감정싸움으로 서로를 힘들게 했는지, 불행의 발단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준규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실체 없는 환영과 싸웠다. 그 싸움으로 자신을 힘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도 아프게 했다. 준규도 지민도 모두 답을 알고 있었지만, 애써 틀린 답만 좇았다. 지민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술에 취한 탓인지 자꾸만 내려오는 눈꺼풀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기다려야 하는데, 지민을 만나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어느새 준규는 식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지민은 아빠 생신 음식을 준비하는 엄마를 돕기 위해 반차를 내고 일찍 친정에 도착했다. 준규와는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만나기로 했지만, 혼자서 음식 할 엄마를 생각하니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사실 지민은 그전까지 아빠 생신상을 준비하는 일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변명하자면 학생 때는 공부하느라, 사회에 나와서는 직장 일에 치여서 엄두도 못 냈다. 결혼해 집을 떠나자 비로소 엄마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철이 들었나 보다 싶었다. 게다가 준규와의 일로 업무도 손에 잡히지 않아 아빠 생신을 핑계 삼아 일찍 회사를 나섰다. 그녀 예상대로 엄마는 화려한 음식 솜씨를 뽐냈다.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빨리 먹어 달라고 보채는 듯 빛깔이며 자태를 뽐냈다. 가만히 살펴보니 준비된 음식들 대부분은 오늘 주인공이 아니라 사위와 딸의 취향에 맞춰져 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요?”

“아니 이렇게 일찍 웬일이니?”

“아빠 생신상 차리는 거 거들려고요. 엄마 혼자만 고생하는 것 같아서.”

“시집가더니 철이 들었나? 엄마는 혼자서 하는 게 편하니까 네 방에 가서 좀 쉬어.”

“아니야, 지난 명절에 시댁 가서 많이 배웠어. 나도 거들게.”

“됐어. 안 그래도 네 짐들 정리했으니까 가지고 갈 건 챙기고, 버릴 건 좀 내놔라. 그게 도와주는 거야.”


지민은 결국 어머니 고집을 꺾지 못하고 그녀 방으로 쫓겨 갔다. 생활에 필요한 옷가지들과 신발, 액세서리들은 진작에 챙겨 갔지만, 책이나 음반, 그리고 사진 앨범은 원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하나같이 그녀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이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졸업 이후로는 손도 대지 않았던 전공 서적들, 수천 번은 들었을 서태지와 아이들 앨범들, 그리고 돈 생길 때마다 한 장씩 사 모았던 고전 영화 DVD들까지 무엇 하나 버릴 게 없었다. 지민은 먼지 쌓인 앨범도 들춰 보았다. 돌 사진부터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거쳐 중, 고등학교까지 사진들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지민의 삶이 고스란히 스며있었다. 그녀는 때론 미소 짓고 때론 눈물을 훔치며 사진을 하나하나 찬찬히 곱씹었다. 그때 얼핏 보아도 새것인 앨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앨범이었다. 펼쳐보니 대학 시절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그냥 서랍에 넣어 둔 걸 아빠가 정리한 게 분명했다. 지민은 앨범을 코앞까지 바싹 당겼다. OT 갔을 때, 학교 축제에서 주점을 열었을 때, MT 가서 동기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을 때 사진들까지 있었다. 가장 최근 일인데 기억나지 않는 사진이 더 많았다. 마침 그녀의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다른 건 몰라도 앨범은 꼭 챙겨가. 추억이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거니까. 그런데 오서방은 학교 다닐 때부터 너만 쳐다보더라. 우리 딸이 한 미모 하긴 해도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너만 바라보니? 아주 해바라기야. 아빠랑 사진 정리하다가 한참 웃었다.”


지민도 사진을 보았다. 농활 사진에서도, 학교 축제 때 주점에서 찍은 사진에서도, 준규 졸업앨범을 찍던 날 후배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도 그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을 향했다. 그동안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준규는 언제나 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울타리를 지켜주면서 도움이 필요할 때 먼저 손 내밀어 주었다. 준규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민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단 한 사람. 지민은 둘 사이의 비틀림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생각했다. 누가 잘못했는지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한 일이었던가! 중요한 건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민은 준규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를 보면 눈물부터 나올 것 같았다. 지금은 그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엄마, 나 회사에서 급한 연락이 와서 다시 회사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아빠한테는 나중에 전화드릴 테니까 오빠 오면 먼저 식사해요. 죄송해요.”


지민이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며 집을 나섰지만, 그녀의 엄마는 딸이 거짓말한다는 걸 금방 눈치챘다. 한 남자와의 40년 결혼 생활을 버텨낸 그녀였다. 40년 내내 햇볕 쨍쨍 맑은 날이었겠는가? 그저 비 온 후 땅이 굳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제8화 : 명절은 누가 만들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