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 명절은 누가 만들어서

(주말의 소설) 너와 나의 연애소설

by 조이홍

새해가 밝았다. 결혼 후 맞이하는 첫 명절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남자에게는 이전과 똑같은 설일 뿐이겠지만, 여자에게는 시댁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처음으로 완전히 몸을 내던져야 할 격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했다. 지민에게 '처음'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단어였는데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마치 44m/sec의 강력한 돌풍을 동반한 초대형 태풍이 불어닥치리라 예고라도 하듯 요동치는 그녀의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명절이 다가올수록 잠도 이루지 못하고 입맛도 없었다. 그녀 집에서는 차례나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명절 음식도 가족이 함께 한 끼 식사를 할 정도로 간단하게 준비했다. 가족 누군가의 생일 때처럼 평소에 잘 먹지 않는 특별한 반찬 두세 가지를 더 준비하는 정도였다. 그 일도 오롯이 엄마 몫이었다. 명절이라도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조용한 분위기였다. 준규네 집은 달랐다. 설과 추석 말고도 일 년에 몇 차례나 제사를 지냈다. 아버지 형제가 많은 덕분에 명절이면 작은어머니들과 함께 모여 시끌벅적하게 음식을 준비했다. 끝없이 음식을 만들고 먹고 치우고 떠들썩한 명절을 보냈다. 준규로부터 사전 정보를 파악한 지민은 마음을 굳게 먹고 앞치마와 고무장갑까지 준비해 시댁으로 향했다. 준규는 어머니와 작은어머니들이 명절 음식은 모두 만들 터이고 그도 틈틈이 도울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그녀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준규는 몰랐다. 남자에게 군대라면 여자에게는 시댁이었다. 군대는 한번 다녀오면 끝나지만, 시댁으로 향하는 길은 '오토 리버스'였다. 결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시댁이 싫으면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을까! 작은 튜브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거대한 바다로 떠밀려가는 듯한 그녀의 기분을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8화 그림.jpg <일러스트레이션 by 사비연필>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명절 음식 준비는 대부분 끝나 있었다. 준규 말처럼 지민이 해야 할 일은 없었다. 몇 가지 간단(숙련된 주부는 10분이면 끝내지만 초보 주부 지민에게는 반나절 일거리인)한 나물 반찬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 몫이 될 수 없었다. 고된 직장 생활하는 새색시는 들어가 쉬라는 시어머니와 시댁 어른들의 배려 덕분이었다. 쉬는 게 더 불편한 지민이 앞치마를 두르고 팔을 걷어 부치자 마지못해 시어머니는 음식 만들기가 끝나면 정리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무언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생기자 그녀 마음도 조금은 편안해졌다. 그렇게 여자들이 분주하게 명절 음식을 준비하고 정리하는 동안 남자들은 방금 만든 따뜻한 전에 술 한잔을 하거나 바둑을 즐겼다. 지민이 안쓰러운 준규가 설거지를 맡겠다고 나서자 그의 어머니는 여자들 손도 많은데 아들까지 나설 거 없다며 쉬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했다. 지민은 자신의 집에서는 식사가 끝나면 아빠가 뒷정리나 설거지를 하는 일이 너무 당연해 그 상황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게 이틀 동안 다섯 끼의 상차림을 준비하고 물리면서 지민은 온갖 설거지를 도맡아 했고, 준규는 그저 지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준규는 본가에 머무르는 마지막 날 저녁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함께 골목을 누비며 뛰어놀던 친구들이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에 진출하면서 동네 친구들과 만날 기회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나마 이제는 1년에 두 번, 명절에야 겨우 만났다. 친구가 많은 준규에게도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이들이었다. 게다가 이번 모임은 가장 먼저 결혼한 준규가 지민을 정식으로 소개하는 자리라 친구들도 잔뜩 벼르던 참이었다. 결혼식에서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인사를 해도 누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준규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친한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안달 날 지경이었다. 하루 전날 부모님께 외출 허락을 받아 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외출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약속 시각을 두 시간 남겨놓고 지민이 갑자기 모임에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직접 음식을 만들지는 못해도 시부모님 저녁 식사를 챙겨 드려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친척들도 모두 돌아가고 두 분만 게신데 집을 비우기가 계속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준규는 부모님을 챙기려는 그녀의 살가운 마음이 내심 고마웠다. 하지만 이번 모임 역시 중요했다. 게다가 오늘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지민이었다. 몇 번이고 상황을 설명하고 그녀를 설득했지만 결국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모임을 주선한 자신이 이제 와서 약속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준규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두고 혼자 외출하기로 했다. 시댁에 홀로 남은 지민은 어른들 저녁을 챙겼다. 두 분 모두 친딸처럼 편하게 대해 주었지만 아직은 준규만이 유일한 가족이었던 그녀는 그날 저녁 몰래 눈물을 흘렸다. 왜 눈물이 흐르는 것인지 그녀 자신도 짐작할 수 없었다.


시댁에서 이틀을 보내고 마침내 자신의 집에 온 지민은 이제야 마음 편하게 숨 쉬었다. 시댁 어른들이 아무리 편하게 대해주어도 내 집만큼 편하지 않았다. 사실 시댁에서는 화장실 가는 것조차 일이었다. 화장실에 있으면 마음이 불안했다. 친정에 도착해서 세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기름진 음식들의 잔해를 모두 비워냈다. 오랜만에 엄마가 해 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자 울적했던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기분 좋게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준규는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그것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만류하는 장모님을 뒤로하고 장인어른이 어느새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준규는 장모님이 내어준 과일을 먹으며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집에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장인어른 모습을 자꾸 쳐다보았다. 지민 역시 그런 준규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날 저녁 지민 방에서 잠자리에 든 두 사람은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서로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두 사람 모두 마음속에 큰 성을 쌓고 점점 그 안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러자 성벽 바깥에 뾰족한 가시가 돋아났다. 나란히 누웠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성 안에서 쉽게 잠들지 못했다.


명절이 끝나면 이혼하는 부부가 늘어난다는 뉴스를 보고 놀라곤 했던 준규는 이제 조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처가에서 아침을 먹고 일찍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지난 사흘간 보여주었던 서로의 행동에 대해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속마음을 토해냈다.


“오빠는 어떻게 나만 혼자 두고 친구들을 만나러 나갈 수 있어?”

“친한 친구들이 너를 꼭 보고 싶다고 해서 약속을 잡은 건데 갑자기 나가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해?”

“며느리가 명절에 어떻게 시부모님을 두고 외출을 해, 저녁상도 차리고 뒷정리도 해야지.”

“하루 전날 어머니, 아버지께 허락까지 받았잖아. 그리고 안 가려면 미리 말해 줘야지!”

“명절은 여자만 일하는 날이야? 나는 쉬는 것도 불편해 뭐라도 하려는데 오빠는 어떻게 앉아서 TV만 보고 있어?”

“나도 고생하는 네가 안쓰러워서 설거지라도 도우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못하게 하잖아!”

“오빠는 우리 집에서도 아무것도 안 했잖아! 우리 아빠는 언제나 한다고!”


언뜻 보면 두 사람이 대화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 이 순간 누구도 상대방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애초부터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동안 상대에게 발견하지 못했던, 보고 싶지 않았던 행동에 실망감을 쏟아낼 뿐이었다. 지금까지 두 사람은 살아온 과정과 환경이 다르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름에서 오는 차이는 사랑으로 극복하리라 믿었다. 게다가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더라도 두 사람 모두 합리적인 편에 속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순 없지만, 그들은 언제나 선의 편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이 어긋나기로 작정한 이상 이런 사실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조차도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는데 하물며 사리(事理)라든가 이성(理性)을 위한 공간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어쩌면 결혼은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면 서로 다른 두 문화의 충돌이었다. 그 과정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했다. 대체로 부정적인 면은 잠재적인 위협으로만 존재해 수면 아래 가라앉았다. 흔히 말하는 사랑의 유통 기한 안에서는 긍정적인 면만 극대화되었다. 명절이라는 상황은 좀 특별했다. 이때는 우주의 기운이 바뀌는지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되기 일쑤였다. 사랑이 넘쳐나고 사이좋은 부부라도 그 위기를 현명하게 대처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백년해로(百年偕老)한 어느 노부부의 숨은 비법도 그저 못 본 척 눈 감아버리는 것이 전부인데 하물며 햇병아리 부부인 준규와 지민에게 위기를 피해 갈 묘수가 있을 리 없었다. 한동안 계속된 대화에서 고성은 오고 가지 않았지만, 오히려 너무 차분했기에 이번 냉전이 꽤 오래 지속될 것임을 예고했다. 스스로 만든 성에 갇힌 두 사람은 그곳을 벗어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은 채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려고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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