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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Apr 01. 2021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시

송경동시집 <나는한국인이 아니다>와수록시'허공클럽'

 송경도 시인의 시는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소시민인 내게는 가시방석이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아니 그건 너무 하고 한 달에 한 번 시인의 시와 마주해 볼까 한다. 

 그의 시가 나를, 우리를 불편하게 했으면 좋겠다. 

 불편함이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 지켜볼 참이다.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김진숙 씨가 수백 일째 고공농성으로 기네스 기록을 갱신하고 있을 때, 아이디어 많은 박점규가 '고공클럽'을 제안했다. 그간 평지에서 살지 못하고 고공으로 올라간 사람 백명만 엄선해 모아보자는 계획이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때 포클레인에 올라간 나도 당연히 회원일 거라 했는데 그만 탈락하고 말았다. 농성하다 떨어져 병원 신세까지 진 나를 왜 빼느냐고 항의하자, 거긴 5미터밖에 안돼 자칫 '고공클럽'을 희화화할 수 있단다. 제일 높이 오른 이는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으로 130미터. 정히 불만이면 '저공클럽'을 만들란다.


 다른 후보의 탈락 사유는 정말이지 너무했다. 그는 부평 GM대우 비정규직으로 한강 다리 난간에 매달려 있다 강으로 뛰어내리기까지 했다. "야, 나는 30미터도 넘는데 왜 빼?" 하자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었다. 거기는 고공이 아닌 '허공', 불만이면 '허공클럽'을 따로 만들라는 말에 모두 깔깔거렸다. 


 그렇게 피눈물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지상에선 존재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사람들의 클럽 하나가 만들어졌다. (허공클럽)




 시집에 수록된 시들 중에 '허공클럽'을 읽을 때는 작품의 밝은(?) 분위기와는 달리, 시인의 말대로 피눈물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이들의 역설에 숨 죽였다. 웃을 수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 단어와 단어 사이를 배회할 뿐이었다. 송경동 시인의 시는 그랬다. 나를 시간 속에, 언어의 늪 속에 밀어 넣었다. 비틀거리다 주저앉혔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 그의 시와 마주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게 전부니까. '뺀찌 예찬', '시인과 죄수', '학문이 열리던 날', '마지막 잎새', '여섯 통의 소환장', 모자를 쓰고 싶었다',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너희는 참 좋겠구나',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를 읽을 때도 그랬다.  




 2016년에 출간된 송경동 시인의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에 수록된 시들은 '시'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그늘이며 아픔이고 상처다. 깨어 있고자 몸부림치는 한 시인의 분노이며 절규다. 그리고 고독한 인간의 자기 고백이자 한숨이며 동시에 희망이다. 그의 시는 아름답지 않다. 아니, 아름답다. 내가 뭐라고 그의 시를 향해 미추(美醜)를 논할까. 하나의 사물, 하나의 사실을 바라볼 때도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만 보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시대에 말이다. 소시민인 내가 아무리 수십, 수백 번 그의 시를 고쳐 읽어도 단 한 줄에 담긴 의미에 닿지 못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데모하는 길거리 시인'으로만 알던 그를, 그의 시를 왜 부러 찾아보고 일말의 가책을 모순된 양심 속에서 꺼내 본 걸까? 용궁에 간 토끼의 거짓말처럼 그걸 꺼내 봄 햇살에 말리려고 그랬던가? 마침 날씨가 너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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