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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May 15. 2021

미각을 잃고 행복을 얻다

미처가(美妻歌): 사랑의 레시피<아내의된장찌개국>리라이팅

 아내와 나는 5월의 신록 같은 생생함과 발랄함이 가득했던 '청춘의 시절'에 만나 결혼했다. 내가 스물아홉, 아내는 스물일곱이었다. 철부지였던 20대의 나는 혼자서 30대를 맞이할 용기가 없었다. 마치 '최후의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혼자서 유난을 떨었다. 20대의 끝자락에서 천사 같은 아내가 손 내밀어준 덕분에 혼자가 아닌 사랑하는 사랑과 함께 서른의 첫 날을 맞이했다. 그 날은 다른 날처럼 완벽하게 평범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 처음 출근하는 날, 새벽부터 아내는 분주하게 아침상을 차렸다. 손바닥만 한 신혼집이라 작은 밥상 하나를 책상으로 식탁으로 사용했다. 밥상에 소담하게 차려진 아침밥은 보기만 해도 배불렀다. 출근하는 오빠(아내는 지금도 오빠라고 부른다)한테 아침밥을 해주고 싶었다는 아내 말에 더없이 행복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했다. 똑같이 직장 생활하는데 아내만 아침밥을 준비하는 건 뭔가 부당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내가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할 자신도 없었다. 오빠 아침은 꼭 준비해주겠다는 마음씨 고운 아내를 설득해 우유나 과일로 간단하게 해결하자고 했다. 모든 일은 이날 시작되었다. 


 맞벌이 부부라 주중에 함께 밥 먹을 일이 없었다. 야근이 많은 난 밖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혼자 있는 아내도 간편식으로 대충 때우기 일쑤였다. 주말에는 주로 여행이나 외식을 해 집에서 밥 먹을 일이 없었다. 게다가 요리장인(匠人) 장모님께서 국이며 반찬을 수시로 만들어 냉장고를 채워 주셨다. 결혼 초에 '난 밥 먹을 때 꼭 국이 있어야 해'라고 생각 없이 뱉은 말을 즉각 철회한 이후로 아내가 음식 만들 기회는 점점 사라졌다. 아내가 아파트 앞 상가 반찬가게의 VIP 손님이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본격적으로 아내가 요리에 입문한 것은 첫째 아이를 낳은 후부터다. 모성애란 위대했다. 아이에게 바깥 음식을 먹일 수 없다며 이유식이며 간식을 직접 만들었다. 재료도 최상급만 사용했다. 이때 등장한 풍경 하나! 식사 시간이면 주방에 요리책이 펼쳐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요리책이 수북이 쌓였다. 비록 점심에 준비해 저녁으로 먹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만, '용장 밑에 약졸 없다'라는 말처럼 장모님 솜씨를 물려받은 아내 손맛은 갈수록 세련되고 깊어갔다. 문제는 아내 음식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것이었고, 더 큰 문제는 아내 음식이 내게는 정말 맛있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처음 끓인 조개 미역국이 너무 맛있어 난리가 났다. 두 대접이나 해치웠다. 내가 나서서 처가에 나눠드리자고 설레발을 쳤다. 큰딸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장인·장모님은 여러 차례 먹어보려고 시도했지만, 너무 비려서 결국 하나도 드시지 않았다고 했다. 의사 표현이 확실해진 아이들은 어떤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아이들은 엄마 음식 앞에 냉정했다. 여름철 보양식으로 아이들 먹인다고 몇 시간이나 정성 들여 만든 닭곰탕을 한입 떠먹고는 "엄마 맛이 이상해." 하며 입도 대지 않았다.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세운 나는 뭔가! 아이들을 따로 불러 '착한 거짓말'과 '사회생활하는 법'에 대해 한바탕 연설했다. 이런 날엔 집안이 시베리아가 되었다. 추웠다. 요리를 향한 아내의 열정이 사그라들까 봐 더 열심히 먹었다. 단지 할리우드 액션만은 아니었다. 내 입맛에는 정... 말... 괜찮았다. 아내는 화학조미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직접 육수를 만들었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건강하게 만든 음식에 맛이 뭐 그리 중요한가!


 시간이 갈수록 아내 요리 목록이 늘어갔다. 카레를 시작으로 미역국, 닭곰탕, 닭볶음탕, 김치찜, 김치찌개, 수육, 잡채, 배춧국 등등 웬만한 요리는 거침없이 만들었다. 요리책은 사라졌다. 만드는 시간도 짧아졌다. (이제 이론적으로 하루 세끼가 가능했다) 아이들도 맛있게 먹었다. (사회화의 산물이었을까?) 요리를 향한 아내의 담대한 여정은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녀의 나침반이 향한 곳은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된장찌개였다. 흔하지만, 결코 쉽게 그 맛을 내어주지 않는 최고 난도 음식이었다. 


 가족 모두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아내는 먼저 북어 대가리와 껍데기, 디포리, 말린 홍합, 파뿌리와 무로 육수를 냈다. 함께 넣을 두부와 애호박, 버섯과 감자 등을 민첩하게 다듬었다. 동시에 두툼하고 맛 좋은 명란 계란말이, 텃밭에서 따온 싱싱한 채소로 샐러드도 준비했다.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동작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렇게 준비가 끝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식탁에 앉았다. 아내가 식탁에 오늘의 주인공을 올려놓자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뚜껑을 열자 먹음직스러운 된장찌개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내는 잠깐 고개를 갸우뚱했다. 국그릇을 받으니 그 의아함이 이해되었다. 찌개라기엔 넘치고, 국이라기엔 부족했다. "이거 된장찌개국이네. 엄마가 개발한 신메뉴야!" 발 빠른 대응에 스스로 만족했다. 얼른 잘 익은 감자와 호박을 뜨끈한 국물과 함께 한 입 떠먹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너무 뜨거웠다) 된장찌개면 어떻고, 된장국이면 어떤가! 건강하고 품격 있는 맛이었다. 첫째 아이도 얼른 한 숟가락 떠먹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둘째는 슬쩍 눈치 보고 두부만 건져 먹었다. 그제야 아내도 한숨 돌리며 작품을 맛보았다. 폭풍전야와도 같은 정적이 잠시 흘렀다. 그 순간 아내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이거 너무 맛없다!" 당황스러웠다. 어떤 일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던 아내가 자기가 만든 음식이 맛없다고 울다니! 아내가 기대했던 맛이 아니었을까? 첫째와 함께 정말 맛있다며 아내를 달랬다. 그때 옆에 있던 둘째가 "다행이다엄마랑 생각이 같아서."라는 게 아닌가! 솔직한 둘째 덕분에 아내는 완벽한 된장찌개국을 만들기 위해 다시 요리책을 펼쳤다. 그리고 마침내 '된장찌개국 육수에는 딱새우'라는 필살기를 터득해 담대한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19년 결혼생활을 통해 미각을 잃고 행복을 얻었다. 가끔 생각해 본다. 처음 출근하는 날 아내가 해주겠다던 아침밥을 마다하지 않았다면, 그때부터 아내가 요리하는 재미를 알았다면 미각과 행복 두 가지 모두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다, 삶이란 모든 걸 다 내어 주지 않는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이니 현재에 만족해야 한다. 그래도 이제 조금 알 듯하다. 가족을 위해 아내가, 우리 어머니들이 매일 해왔던 질문과 그 속에 담긴 마음을. 


 "오늘은 뭐 해 먹지?"



 아내는 요즘 '콩나물국'에 도전 중이다. 사실 콩나물국은 암묵적으로 도전하지 않기로 했었다. 육수를 낼 수도 없고, 콩나물 외에 들어가는 재료도 없어 맛 내기 까다로운 음식이었다. 10여 년 전 한솥 끓인 콩나물국을 내버린 사건 이후 마치 볼드모트처럼 입에 올리지 않았더랬다. 개인적으로도 군대에서 콩나물국과 악연이 있기에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얼마 전 처가에서 식사를 하는데 첫째 아이가 외할머니(장모님)가 끓여주신 콩나물국을 너무 좋아했다. 두 그릇이나 뚝딱 비웠다. 얼마 후 아내가 콩나물국을 끓였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평범하지만 위대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글은 브런치에 썼던 글 <아내의 된장찌개국>을 리라이팅 했습니다. 최근 에피소드까지 곁들이고 다듬었습니다. 사실 '푸드스토리 공모전'에 응모했던 글이기도 한데, 거기에는 담지 못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올해 '아름다운 아내를 노래하다(미처가 / 美妻歌)'를 다시 써보기로 했는데 그중 한편으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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