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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un 14. 2021

한 평 텃밭도 내 마음 같지 않지만

내가 들인 품만큼 내어 주겠지

 주말인데 웬일로 비가 오지 않았다. 날이 좋아서, 좋다 못해 햇살이 너무 따가워서 물 주러 아이들과 함께 텃밭에 올랐다. 세상 무서울 게 없다는 중2 첫째는 2년 만의 텃밭 행차였다. 오랜만에 텃밭에 와보니 많이 변했다고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나? 풋! 하긴 겨우내 꽁꽁 얼었던 한 평 텃밭을 일구고 밑거름을 주고 씨앗을 뿌리는 일은 언제나 아이들 몫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호미며 모종삽을 기꺼이 들고 시키지도 않은 허드렛일을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인 양 푹 빠져 즐겼더랬다. 아빠를 닮아 귀공자풍 외모를 가진 첫째 아이는 텃밭의 인기 스타였다. 텃밭 가꾸기보다 더 재미있는 놀이가 생기고, 학년을 올라갈수록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첫째 아이가 텃밭에 올라오는 일은 점점 뜸해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둘째 몫이 많아졌다. 아내를 닮아 튼튼한 허벅지를 가진 둘째 아이는 텃밭 일을 하기에 최적화된 신체 조건을 가졌다. 첫째보다 어린 나이에 텃밭에 올라오기 시작했으니 애정도 더 깊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이 되자 둘째도 슬슬 텃밭이 지겨워진 눈치다. 텃밭에 올라가지고 하면 두 번에 한 번은 아빠 혼자 다녀오란다. 앞으로 텃밭 가꾸는 일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될 터였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이사 오기로 결심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용한 시골, 허허벌판에 새로 지은 아파트라 한가하면서도 깨끗해서 좋을 듯했다. 다른 하나는 텃밭 때문이었다. 우리 세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땅바닥에 뒹굴면서 놀았다. 딱지치기, 구슬치기, 오포(오징어포), 비석 치기 등등 모든 놀이가 흙 위에서 이루어졌다. 해 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면 옷에서는 먼지가 풀풀 풍겼다.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땟국물과 손톱 끝에 훈장처럼 달린 검은 때가 얼마나 격렬한 놀이를 했는지 짐작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매일 자연스럽게 먹은 흙이 못해도 한 스푼은 족히 넘을 터였다. 그래도 아픈 아이가 없었다. 요즘 아이들처럼 문턱이 닳도록 병원에 다니는 친구들은 나를 포함해 아무도 없었다. 우리 아이들도 나처럼 흙을 만지며 자라게 해주고 싶었다. 사실 요즘은 일부러 맨 땅을 찾지 않으면 주위에서 흙 구경하기도 힘들지 않던가!


 한 평 텃밭 가꾸기는 아이들이 흙을 만지며 놀 수 있는 일종의 자연 놀이터로 시작했다. 사실 텃밭 가꾸기 경험이 없던 우리 부부도 첫해는 그저 쌈 채소 씨앗을 사다가 뿌릴 뿐이었다. 한 평에서 나오면 얼마나 나오겠어했다. 예상을 뒤엎고 손바닥만 한 텃밭에서 나오는 쌈 채소는 우리 네 식구가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많았다. 모종이 아니라 씨앗을 뿌렸기에 촘촘하게 싹튼 쌈 채소는 징그럽기까지 했다. 그때부터였다. 새싹 비빔밥을 즐겨 먹게 된 것이.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나눠 먹기에도 한 평 텃밭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해마다 초봄이 되면 올해는 무엇을 심을지 가족회의를 열곤 한다. A4 이면지를 준비해 직사각형을 그리고 한 평을 6칸으로 나눈다. 모종 기준으로 한 줄에 4개에서 5개까지 작물을 심는 것으로 계획한다. 이론상 적게는 24개, 많게는 30개 모종을 한 평 텃밭에 심을 수 있다. 아이들은 주로 토마토나 오이를 심자고 하고 아내는 샐러리나 호박을 선호한다. 내 원픽은 다양한 쌈 채소다. 각자가 원하는 걸 다 심으려면 한 평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한 평만 더 있으면 좋겠다 욕심이 생길 때도 있지만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진다. 지난 10년 간 한 평에서 수확한 작물도 다 먹지 못했으니 그것이 얼마나 불필요한 일인지 잘 알았다. 개수를 조정하고 우리 텃밭과 연이 닿지 않았던 작물은 과감하게 포기했다. 그동안 수박, 딸기, 브로콜리, 파프리카, 블루베리 등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이런 과일이나 야채는 구입해서 먹는 걸로! (수박은 딱 야구공만 한 크기로 자라더니 더는 자라지 않았다 T T)


 6월 13일 현재 기준, 샐러리와 케일은 풍년이다. 샐러리 모종 6개, 케일 모종 2개를 심었는데 이미 본전을 뽑고도 남았다. 씨앗으로 뿌린 청겨자, 청상추, 적상추와 깻잎도 성과가 좋다. 사내아이 둘이 시끄러울 법한데 단 한 번도 얼굴을 붉히지 않는 아래층에 첫 수확한 싱싱한 샐러리와 케일을 갖다 드렸다. 인상 좋은 아래층 아주머니는 둘째 아이 편에 쿠키와 떡을 쥐어 돌려보내셨다. 층간 소음 문제로 법정까지 가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요즘 천사 같은 이웃을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내는 종종 아래층이 이사 가지 않을까 걱정한다)  

<왼쪽부터 샐러리, 케일, 청겨자와 깻잎>

 3개의 모종을 심은 오이는 2개가 남아 잘 자라고 있다. 오늘 길고 굵은 오이 두 개를 처음으로 수확했다. 우리 텃밭은 오이와 궁합이 잘 맞는 편이었는데, 초반에 모종 하나가 말라죽었다. 그래도 나머지 2개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있다. 벌써 내 키보다 훨씬 자랐다. 벌들이 부지런히 수분하는 걸 보니 올해 오이도 걱정할 게 없을 듯하다.

<노란 오이꽃 사이로 열심히 일하던 꿀벌을 보았는데 사진 찍으려고 하자 부끄러운지 날아가 버렸다>

 파테크로 심은 파들은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씨앗을 뿌려도 모종을 심어도 번번이 실패했더랬다. 이번에도 안되면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은 마지막 모종으로 겨우 성공했다. 아마도 이 파들이 다 자라 수확할 때쯤이면 파 가격도 안정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좋은 경험을 쌓았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올해 가장 공 들인 파, 이만큼 자라주어 고맙다. 너 아까워서 먹겠니?>

 대추방울토마토와 토마토도 심었다. 토마토는 항상 두 종류로 심었는데 이상하게도 한 종류만 잘 자랐다. 올해도 대추방울토마토 쪽이 훨씬 잘 자란다. 키 차이가 벌써 두 배는 난다. 같은 땅에서 같은 밑거름과 윗거름을 주고 키우는데 왜 둘 다 잘 자라지 않을까 의아했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힘닿는 데까지 잘 돌봐줄 뿐 그 이상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 부디 올해는 두 녀석 모두 잘 자라주면 좋으련만······.

<대체로 방울토마토가 잘 자란다. 가지치기를 해주지 않으면 방울토마토는 정말 거침없이 뻗어간다>

 아내의 된장찌개국을 장식할 호박도 우리 텃밭과 궁합이 잘 맞는 편이다. 지난해까지 모종 2개를 심었는데 미처 다 먹지 못해 올해는 1개만 심었다. 사실 호박은 줄기가 엄청 많이, 길게 뻗어가며 자라는 식물이라 한 평 텃밭에 호박 하나만 심어도 꽉 찰 지경이다. 이미 자리 잡은 다양한 식물 사이사이로 길을 만들어 호박 줄기가 상하지 않고 뻗어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잡아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자칫 잘못하면 이웃 텃밭을 침범할 수도 있다. 호박은 가는 줄기로 자신의 몸을 지탱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 칭칭 감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옆집 텃밭의 식물을 감으면 곤란하다.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지만 그래도 왠지 호박에는 정이 많이 간다.

<이렇게 예쁜 호박이 왜 '추(醜)'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가지와 고추(청양고추, 오이고추)는 우리 텃밭과 궁합이 잘 맞지 않는 식물들이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욕심을 부렸더니 역시다. 잘 자라나 싶더니 열매 맺는 것이 신통치 않다. 고추 하나는 꽤 크게 자랐는데 어느 순간 말라버렸다. 고추 모종은 모두 5개를 심었는데 나머지 4개도 비슷한 시기에 심은 다른 텃밭의 고추들에 비하면 턱없이 작고 약하다. 왜 이 녀석들만 이러나 싶다. 오늘 텃밭 4대 천왕 중 한 분이 잘 자라는 텃밭 고추들은 '약(농약)'을 뿌린 것이라고 했다. 비결이 약이라면 녀석들을 그렇게까지 해서 키우고 싶지는 않다. 우리 가족과 이웃들이 나눠 먹는 야채이기 때문이다. 부디 애정 쏟는 만큼만 잘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가지도 고추도 신통치 않다. 오른쪽 녀석은 병에 걸렸는지 시름시름 앓는 중이다>

 한 평 텃밭에 참 많은 걸 심었다. 어떤 녀석은 잘 자라고 어떤 녀석은 잘 자라지 않는 게 참 신기하다. 정말 우리 텃밭과 궁합(또는 인연)이 잘 맞는 식물이 따로 있는 걸까? 왜 안 되는 녀석들은 늘 안 되는 걸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 평 텃밭을 가꾸는 일이 내 마음 같지는 않지만,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 텃밭을 가꾸면서 이곳에서 나고 자란 다양한 채소로 식탁을 채우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고 보람도 있다. 전형적인 초등학생 입맛인 둘째도 손수 키운 쌈 채소와 호박은 잘 먹는다. 물론 오이나 고추는 예외다. 요리 실력이 경지에 오른 아내도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들로 실력 발휘를 한다. 요즘 아내는 샐러리에 꽂혔다. 바질이 들어가는 돼지고기 덮밥은 샐러리를 넣어도 맛있다. 마침 바질을 집안에서 키우고 있어 각각 만들어 먹어 봤는데 아내도 나도 샐러리를 넣는 게 더 입에 맞았다. 바질이든 샐러리든 먹지 않는 아이들도 덮밥으로 해주면 정말 잘 먹는다. 채소를 잘 먹지 않는 아이들이 골고루 잘 먹게 하는 방법 중 하나는 텃밭 가꾸기가 아닐까 싶다. 텃밭이 없는 경우는 발코니 공간을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일 듯하다.


 톨스토이 단편 중에 '달걀만 한 씨앗'이라는 아주 짧은 글이 있다. 길에서 주운 달걀만 한 씨앗이 궁금해진 황제가 그 내력을 확인하는 과정을 그렸다. 여기에는 늙은 노인, 늙은 노인의 아버지, 늙은 노인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런데 나이 상으로는 가장 어린 '늙은 노인'이 가장 늙고 병약해 보인다. 말귀도 잘 알아듣지 못한다. 황제가 그 이유를 늙은 노인의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제 품으로 살아가기'가 어떤 의미인지 새겨볼 만하겠다.

 "그럼, 두 가지만 더 말해 보라. 한 가지는 어째서 옛날에는 이런 씨앗이 생겼는데 지금은 생기지 않나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그대의 손자는 두 자루의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또 그대의 아들도 한 자루의 지팡이를 짚고 왔는데 그대만이 그처럼 가뿐히 혼자 걷는가 하면, 눈도 밝은 데다 이도 실하고 말도 또렷하고 상냥함은 어찌 된 영문인가? 노인, 말해 보라."

 "하문하오신 두 가지 까닭이란, 다름이 아니오라 세상 사람들이 제 품으로 살아가기를 그치고 남의 것을 넘보게 되었기 때문이옵니다. 옛날 사람들은 신의 뜻을 좇아 살았사옵니다. 제 것을 가질 뿐,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던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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