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방역의 힘을 온몸으로 느꼈다
수위의 죽음은 영문도 모를 징조들만 난무하던 한 시기에 종지부를 찍고, 초기의 뜻하지 않은 놀라움이 차츰차츰 뚜렷한 낭패감으로 변해 가는,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다른 한 시기의 시작을 점찍어 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시민들은, 이제부터는 차차 깨닫겠지만, 하필이면 우리의 이 자그마한 도시가 쥐들이 밖으로 기어 나와 죽고 수위가 괴상한 병으로 목숨을 잃는 도시로 특별히 지정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시민들은 요컨대 착오를 일으킨 셈이어서 그들의 생각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었다. 만약 모든 일이 거기에 그쳤더라면 아마도 그 일은 습관 속에 묻히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민들 중에서 그 밖에도 몇몇 사람들이 그것도 반드시 수위나 가난뱅이가 아닌 사람들이, 미셸 씨가 먼저 밟은 길을 따라가야만 했던 것이다. 공포가, 그리고 공포와 함께 반성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페스트' 中에서)
우리나라에 첫 코로나 환자가 발생한 건 2020년 1월 20일이다. 해외에서 유입된 환자였다. 이후 9일 동안 4명의 환자가 발생했는데 당연히 모두 해외유입이었다. 열흘째 되던 1월 30일에 해외 유입 환자와 접촉한 국내 첫 확진자가 나왔다. 1월 30일 누적 확진자 7명 중 해외 유입 6명, 국내 발생 1명이었다. 이때 우리는 처음 쥐의 죽음을 목격한 오랑 시민들처럼 코로나에 무관심했더랬다. 뉴스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여기서 그쳤다면 다른 수많은 뉴스처럼 그저 타인의 이야기가 되어 습관 속에 묻히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20일 후, 모든 게 변했다. 우리 역시 공포와 함께 원망과 반성을 시대를 짊어졌다. 천만다행으로 우리에게는 믿음직스러운 방역 기관, 기꺼이 희생하는 의료진, 사회적 거리두기에 자발적으로 동참한 깨어 있는 시민이 있었다.
2021년 6월 24일 자정 기준, 우리나라 코로나 누적 확진자는 153,789명이다. 격리 해제는 145,389명이고 사망자는 2,009명이다. 백신 접종률이 높아지면서 코로나와 안녕을 고했던 영국과 이스라엘이 델타 변이 바이러스로 다시 확진자가 늘어나자 방역 지침을 격상했고, 코로나 청정 지역이라 불리던 대만은 하루에도 수백 명의 확진자가 발생하는 등 심각한 수준이다. 특히 대만은 3개월 전만 해도 누적 확진자가 1,000여 명에 불과했는데 현재는 14,260명에 달한다. 코로나는 인간의 자만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근 한 달간 코로나 확진자 수는 평균 500여 명이다. 그 이전 한 달 평균 확진자가 약 580명 정도였으니 감소 추세라 할만하다. 백신 접종률이 증가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우리는 샴페인을 일찍 터뜨리지도 않았다. 여전히 철저한 방역 지침이 최후방 수비수로서 단단히 한몫 중이다. 둘째 아이가 이 펜데믹 상황에 맹장염에 걸렸다. 급히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간 병원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원래 병원이란 곳이 아픈 사람들이 치료받는 공간이라 온통 환자들 뿐이지만, 우리가 갔던 OO병원은 선별 진료소와 백신 접종을 함께 운영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전쟁통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괜찮을까 싶었다. 겁났다. 그곳에도 엄격한 방역 지침이 지켜지고 있었다. 피곤할 정도로 매우 까다롭게….
아파서 서 있기도 힘든 아이와 동네 병원에서 받은 '맹장염' 소견서를 들고 큰 병원을 찾았다. 아파서 데굴데굴 구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걷기도 힘들 만큼 아파했다. 병원 입구에 설치된 체온기로 열 체크를 해보니 정상(36.5도)이었다. 내과에 접수하기 전 (귀에 꽂는) 체온계로 다시 열을 확인해 보니 37.2도였다. 약간의 발열 증상이 있었다. 맹장염이니 당연히 열이 날 수밖에 없었는데 간호사가 원내에서 치료할 수 없으니 원외에 별도로 지정된 호흡기 센터로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맹장염 소견서를 보여줬는데도 발열 증상이 있으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맹장염 걸린 아이를 왜 호습기 센터로 보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방역 지침이라니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지침대로 따랐다.
호흡기 센터를 찾아갔는데 보호자는 한 명만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 아내가 아이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갔다. 20여 분 후 아내가 '원내 출입 허가증'을 가지고 나왔다. 초음파와 엑스레이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다시 원내로 들어가는데 체온 측정을 또 했다. 방문 기록도 또 남겼다. 초음파와 엑스레이를 찍고 나와 호흡기 센터로 갔다. 10분 후 맹장염 확진을 받았다. 당장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번에는 응급실로 이동하라고 했다. 아이는 서 있기도 힘들어했다. 아이 손을 꼭 붙잡고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 앞에서 다시 방문 기록을 남기고 한참을 기다렸다. 마음이 급했는데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구급차에 실려온 응급 환자도 그렇게 했다. 이 정도로 철저하게 방역 지침을 준수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감염되지 않겠구나 생각 들었다. 20분이 지나고 응급실에서 간호사가 아이 이름을 불렀다. 또 체온을 측정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응급실은 보호자 동반이 불가능하나 아이가 어려 보호자 한 명만 입장되었다. 아내가 아이와 함께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응급실 안에서 아이와 아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코로나 검사였다. 음성(정상) 판결을 받은 후 CT를 찍고 수술에 들어갔다. 병원에 도착한 지 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요즘 맹장 수술은 수술도 아니라지만, 아이는 맹장이 터져 수술이 까다로웠단다. 보통 이틀이나 사흘 정도 입원하는데 닷새나 입원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비교적 간단하게 끝날 수술이었을지도 몰랐다. 아무도 원망할 수 없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의료진들은 최선을 다했다. 감염을 막기 위해 수 차례 검사를 실시했다. K-방역의 한가운데 잠시 서있었더랬다. 불편했지만 모두를 위해 공평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입원한 아내에게 간단한 생필품과 갈아입을 옷을 전달해야 했다. 환자는 말할 것도 없고 보호자와 접촉도 불가능했다. 가져간 가방 두 개를 보관소에 맡겼다. 아내가 찾아가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아이가 입원해 있는 병동 간호사분들이 그 짐을 픽업해 주었다. 환자를 돌보는 일만으로도 힘들 텐데 간호사분들이 이런 일까지 맡아야 하나 싶었다. 방역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고 했다. 덕분에 며칠간 아내와 생이별했고, 드디어 사흘째 되는 날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겨우 아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대화는 전화로 했다. 마치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았다.
닷새 만에 가퇴원한 아이는 금요일 비로소 정식으로 퇴원 절차를 밟았다. 의사 선생님도 이렇게 어려운 맹장 수술은 오랜만이라고 했을 만큼 위급한 상황이었다. 입원한 아이는 퇴원하는 날, 그다음 날, 그 다음다음 날까지 매 끼니마다 무엇을 먹을지 계획을 세워두었다. 아이가 먹고 싶은 건 하나도 먹을 수 없었다. 기름진 음식, 맵고 짠 음식, 밀가루 음식은 당분간 먹지 않는 게 좋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 때문이었다. 가퇴원한 날 당장이라고 먹을 것처럼 굴더니 아이는 순순히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따랐다. 아프긴 아팠던 모양이다. 나는 처음 병원에 간 날을 잊지 못하겠다. 그렇게 만은 인파가 몰린 병원은 처음이었고 두려웠다. 코로나가 이 정도였나 싶었다. 그래도 몇 시간 동안 병원에 머무르면서 그 안에서 철저하게 지켜지는 방역 지침을 보고 불편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쉴 틈 없는 의료진이 걱정되기도 했다. 7월이면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된다. 부디 지금까지 뼈를 깎는 노력들이 헛되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 운동을 겸해서 텃밭에 다녀왔다. 일주일 사이 정말 몰라보게 많이 자랐다. 어떤 오이는 수확할 시기를 놓쳐 30cm도 넘게 자랐다. 가만히 두어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 자란다. 수술 후 기운 없어하던 아이도 고추며 호박을 신나게 수확했다. 가만히 두어도 잘 자라는 것은 이 녀석들만은 아닐 텐데 말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