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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ul 23. 2021

고려 시대가 황제국?

고려 시대 왕(황제)의 이름

 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 시대 왕의 이름, 예를 들어 태조, 세종, 영조 등은 묘호(廟號)다. 묘호는 국왕이 승하한 후 올리는 이름이므로 엄격히 말하면 시호(諡號), 즉 죽은 뒤에 공덕을 평가하여 올리는 이름이다. 묘호는 두 글자로 만들어졌다. 앞글자는 시자(諡字)로서 시법(諡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정해진 글자)에 따라 정하고, 뒷글자는 종계(宗系)와 조공종덕(祖功宗德)의 예제에 근거하여 붙이는 조(祖)나 종(宗) 중 하나를 썼다. 


 시법은 중국 고대 주(周) 나라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최초의 시법은 주공단에 의해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각각의 뜻을 가진 시자 103자가 정리되어 있다. 그 뜻은 사자성어로 풀이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시조에게 태(太) 자를 붙였는데 그 뜻은 光啓于禩(광계우사) 즉, '천대(千代)에 빛을 뿌리다'라는 뜻이다. 시자 한자에도 여러 뜻이 있어 공(恭) 자는 아홉 가지 뜻이 있고, 문(文), 영(靈), 장(莊) 자는 여섯 가지 다른 뜻이 있다. 그러므로 시자가 같더라도 뜻이 달라지므로 사용할 수 있는 시자는 모두 194자였다. 고려와 조선에 묘호가 같은 왕이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시호는 시와 호가 의미를 달리하는 합성어로 시는 행위의 자취요, 호는 공을 나타낸다. 위키백과에 시호는 "죽은 인물에게 국가에서 내려주거나 죽은 군주에게 다음 군주가 올리는 특별한 이름으로, 동양의 군주제 국가에서 시행되었다. 시호를 받는 대상은 황제, 제후, 임금 등의 군주와 그 조상 및 부인, 공신, 고급 관료, 기타 국가적으로 명망을 쌓은 저명한 인물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신하에게 준 시호는 통상 두 글자로 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충무공(忠武公)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왕의 이름>이라는 글을 쓰면서 고려 시대 왕의 이름까지 두루 살펴보았다. 휘(이름)는 철저하게 외자에 조종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 보니 고려 시대에 왕과 함께 황제라는 칭호까지 함께 사용했음을 알게 되었다. 가만있자, 고려 시대 왕을 황제라고 불렀던가? 그렇게 배운 적이 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고려는 스스로 황제국이라 칭했다. 태조 왕건은 천자로 칭해지고, 광종 이후로는 황제 칭호가 사용되었다. 천자는 고려의 군주가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하늘의 아들이라는 관념을 표현한 것이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고려가 차지하는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따라서 황제 승하 후 조종 묘호의 사용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대왕 또는 이라는 호칭을 동시에 사용했다. <고려사>에서는 왕이라 기록하고, 왕이 죽은 뒤에는 대왕이라 불렀다. 삼국시대에도 황제와 왕을 구별해 왕이라 칭했다. 황제와 왕은 서열 차이가 확연한데 고려에서 황제와 왕을 함께 칭한 이유가 궁금했다. 마침 지난번 글을 쓰면서 <왕의 이름, 묘호>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임민혁 지음, 문학동네)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어보았다. 어려웠다. (딱 꼬집어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웠다)


 중국 고대 주나라에서는 천자가 왕의 직위를 가졌다. 그 후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주나라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주변 제후국들이 모두 왕을 칭했다. 훗날 진시황이 되는 영정(嬴政)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자신의 위업에 어울릴 만한 특별한 칭호를 원했고, 중국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황'자와 '제'자를 따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었다. 이후 황제라는 칭호는 청나라까지 군주의 명칭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나 시황제 전까지 중국 고대 왕실에서는 왕이 곧 천자를 의미했다. 


 고려에서 왕이라는 칭호는 황제의 지위를 갖는다. 중국 고대 왕실의 전통을 따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은 분명한 듯하다. 이는 황제의 지위를 상징하는 용어를 사용한 데에서 알 수 있다. 왕이 스스로를 일컬을 때 '짐'이라고 한다거나, 왕의 말과 글을 '조''선지'라고 하는 것, 차기 왕위 계승자를 '태자', 신하가 왕을 부르는 호칭을 '폐하'라고 하는 것 등은 모두 황제를 위한 용어였다. 그런데 동시에 제후로서 왕의 지휘에 준하는 제도를 시행했으니, 예를 들어 오묘 제도(제후인 왕이 태조를 비롯해 직계 4대조의 사당을 갖추어 봉사하는 제도, 황제는 칠묘)나 구류면(제후의 모자), 구장복(제후의 옷) 등 여복제(왕이 타는 수레와 의복 제도) 등이 그것이다. 고려를 황제국이라 부르기에 주저하게 되는 이유다. 


 그러나 원나라의 간섭으로 묘호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충렬왕 때부터 중국에서 시호를 내렸다. 왕호 앞의 시자에 원에 충성을 맹세하는 충(忠) 자를 넣었다. 충렬왕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인 원종과 고종을 각각 충견왕, 충헌왕이라 했다. 충렬왕부터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이 이 시기에 해당된다. 이때부터 '짐'은 '고(孤)'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선지'는 '왕지'로 명칭이 변경되는 등 황제를 상징하는 용어의 사용이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충'자가 빠지고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으로 시호가 바뀐다. 이는 원명 교체기인 우왕 때 고려에서 명나라에 시호를 청했기 때문이다. 이를 청시(請諡)라 하는데 이전 원에서 시호를 내린 사시(賜諡)와 구별된다. 


 고려 후기 성리학이 사상계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잡음으로써 오륜을 근간으로 한 명분을 인간관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로 강조했다. 군신과 부자, 천자와 제후 사이에 주어진 직분과 분수에 충실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다. 성리학 관점에서 보면 고려의 묘호 제도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제도였다. 제후국인 고려가 황제를 칭했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지 학자인 이제현, 이색은 역대 국왕의 묘호를 종에서 왕으로 고쳐 썼다. 황제에서 왕의 지위로 스스로 낮추었다.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은 더는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종법에 따라 묘호를 사용했으니 이 역시 황제에게만 허용된 것이었다. 종법에 따른 묘호 사용으로 중국과 빈번하게 마찰이 생겼으나 조선은 종법에 의한 시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종 때는 대한제국을 세워 황제에 올랐다. 동아시아에서 구체제가 저물고 있었다.   


 조선 시대 왕의 이름과 고려 시대 황제의 이름이라는 글은 '왜 왕은 외자 이름을 지었을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왕의 이름과 본명은 같지 않고, 그 이름에도 중국과의 관계나 정치적 상황이나 역학 관계, 생전 업적 등 많은 사실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사대(事大)인가 아닌가를 살피려는 의도도 아니고 그럴 깜냥도 되지 못한다. 그저 역사적 사실(기록)을 짚어 보고 싶었다. 반면 신라시대에는 '진흥왕 순수비'를 통해 확인된 바, 생전의 왕명을 사후에도 그대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진평과 선덕, 진덕 등이 모두 왕의 이름(휘)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는 혁거세나 유리와는 달리 국왕으로 즉위한 후에 지어졌고 사후에 시가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런 왕의 이름은 시호이지 묘호는 아닌 셈이다. 




 '훈요 10조'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대 왕에게 전하는 열 가지 가르침이다. 그중 3조는 왕위 계승과 관련 있다. "왕위 계승은 맏아들로 함이 상례이지만, 만일 맏아들이 불초할 때에는 둘째 아들에게, 둘째 아들이 그러할 때에는 그 형제 중에서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잇게 하라." 적장자 상속이 원칙이지만, 형제 중에 세상 사람이 우러러 따르는 덕이 있는 사람에게 왕위를 계승하라는 내용이다. 470여 년 고려 역사 속에 총 34명의 왕이 있었다. 이 중에서 15명이 장자 계승했다. 예를 중요시한 조선에서는 520여 년 동안 27명의 왕 중에 8명만이 장자 계승했다. 알면 알수록 어렵지만, 또 재미있는 것이 역사가 아닌가 싶다. 




 이 글에서 고려시대 왕과 황제의 혼칭과 시법 등에 관한 부분은 앞서 말한 <왕의 이름, 묘호>에서 인용 및 참고했다. 책이 다소 어려워 충분히 이해하고 글을 썼는지 모르겠다. 틀린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바로 잡아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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