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뼘소설(고전비틀기)
아주 먼 옛날, 충청도 산골 마을에 공(公)씨 성을 가진 사내가 살았다. 천성은 착하나 늦도록 장가를 들지 못했다. 그래도 전생에 쌓은 덕은 있었는지 늘그막에 심성 곱고 속 여문 처자를 만나 혼인했다. 천생배필(天生配匹) 부부는 가난한 형편에도 금실 좋게 잘살았다. 어느 날 만삭이 다된 아내에게 산기(産氣)가 있자, 공가는 산모 몸에 좋은 잉어며 미역, 아기를 위한 배냇저고리를 장만하려고 여름내 키운 콩 서 말을 챙겨 장터로 향했다.
장터로 향하는 길에 백발노인이 마치 짐짝처럼 지게에 실려가고 있었다. 지게를 진 이 역시 초로의 사내였다. 두 눈은 퉁퉁 붓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 모습이 눈에 걸려 슬그머니 옆에 가 말을 건네는 공가.
"한숨이 끊이지 않으니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신가 보오"
"뒤에 계신 노인이 내 어미라네. 식솔은 많으나 벌이는 시원치 않으니 입 하나라도 줄여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신다네. 기어이 홀로 산속에 들어가시겠다고…. 몇 해 동안 고로나(苦擄懦-괴로움이 사로잡으니 무기력해지다) 역병이 퍼져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니, 어찌할 방도가 없어 이제 내 발로 어미를 산속으로 모시고 있다네. 방도 없는 세상이니 방도를 찾지 못하겠네. 그저 하늘을 원망하는 수밖에."
공가는 세상 이치는 잘 몰랐으나 사람 사는 도리는 알았다. 메고 있던 콩을 사내에게 통째로 건넸다.
"이 콩이면 한 달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게요. 안 듣고 못 봤으면 모를까 내 어찌 사정을 듣고 모른 척할 수 있겠소. 하늘은 나중에 원망하고 살 방도를 찾으셔야지요."
사내가 극구 사양했으나 공가의 고집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결국 콩 서 말을 들려 보내고 집을 향해 돌아서는데 그제야 땅이 꺼져라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당장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된다지만, 만삭인 아내와 태어날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어느새 날도 저물어 터벅터벅 무거운 발거음을 옮기는데 한적한 고갯마루에서 웬 동자를 만났다. 눈빛이 초롱초롱한 게 예사 사람 같지 않았다.
"얘야, 이토록 깊은 산중에 어인 일이니? 행여 길이라도 잃은 게니?"
"아닙니다. 귀인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귀인이라니? 나를 말하는 게야?"
"네, 그렇습니다. 오늘 지게를 진 사내를 만나 콩 서 말을 주셨지요? 그분은 사실 옥황상제의 자제분이셨습니다. 하계에 관심이 많으시지요. 천상에서 내려보니 인간의 도(道)가 길을 잃어 근심이 하해를 덮었는데, 마침 귀인을 만나신 것입니다. 갸륵한 마음에 보답하려 귀인께 중한 소식을 전하려 왔습니다."
공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거절했으나 이번에는 동자의 고집이 만만치 않았다.
"여자 아이를 낳을 것입니다. 이름을 지(祉)라고 지으십시오. 하늘에서 '복'이 내릴 것이며, 그 이름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또한 후대에 이 땅에 고로나(苦擄懦) 역병이 다시 창궐할 것입니다. 역병은 이 의서(醫書)에 나온 백신(白汛-흰 물)이 물리칠 것이오니 반드시 후세에 전하라 당부하셨습니다."
공가는 동자의 말대로 딸 이름을 공지(公祉)라 지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이 아이 이름은 부르기 편해야 오래 산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럴듯하게 여겨 부부는 아명을 '콩쥐'라 지었다. 또한 "고로나 백신'이 기록된 의서는 가보(家寶)로 삼아 후대에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람 일이라 가보가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의서 이름이 '거리두기(拒離蠹記-사물을 좀먹어 해독을 끼치는 것을 방어해 끊어내는 기록)'였다고 한다. 지금도 충청도 일대에는 '고로나 백신은 거리두기'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