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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Aug 29. 2021

직장 영어, 어떻게 잘할까?

영어에는 왕도가 없다?있을지도모른다!

 가끔 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 아이 영어 공부를 봐준다. 매번 반복해서 나오는 쉬운 단어도 처음 보는 단어 인양 낯설어하는 아이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 단어 정말 몰라? 한 백만 번쯤은 알려줬을 텐데!' 울화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내 5학년 시절을 떠올리며 화를 누그러뜨린다. 나는 천방지축 개구쟁이였다. 공기에서 흙냄새가 나던 시절이었다. 변변한 장난감이 없어도 세상은 온통 놀이터였다. 친구들과 장난치다 2층 교실에서 뛰어내려 발목을 다치기도 하고, 봉의산으로 구미호 잡으러 갔다가 길을 잃기도 하고, 툭하면 삐라 주우러 먼 동네까지 원정 가곤 했다. 무릎이나 엉덩이가 멀쩡한 바지를 찾기 힘들었다. 공부에는 1도 관심 없었다. 그에 비하면 둘째 아이는 얼마나 대단한가! 벌써 영어도 읽을 줄 알고.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교육 제도는 겉옷만 바꿔 입을 뿐 근본은 바뀌지 않은 듯하다. 단 한 번도! 하나의 목적지를 정해놓고 누가 빨리 달리는지 경주를 시킨다.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느려도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별반 차이는 없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였다가 동조자가 되고 때로는 가해자가 되는 우리들. 


 요즘은 제법 영어 단어가 익숙해졌는지 어려운 단어도 척척 읽어내는 둘째 아이를 보면 대견하다. 불과 두 해 전만 하더라도 온갖 꼼수를 부려가며 자신만의 독특한 영어 세계를 개척했던 엉뚱한 녀석 아니었던가! 오래전에 이곳(브런치)에 소개하기도 했는데, 못 본 독자분들께 다시 한번 퀴즈를 내볼까 한다. 둘째 아이는 왼쪽 영어 단어에 오른쪽 그림을 그렸다. 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두 개 이상 발견한 분은 Genius! (정답은 끝에 공개)

<최초 인류가 동굴에 벽화를 그린 이유가 부모의 숙제 검사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스무 회를 꼬박 외국계 기업을 다녔다. 대학시절 내내 장학금을 탔지만 영어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다. 전공 때문에라도 영어사전보다 옥편을 끼고 살았다. '콜라'를 '미제의 썩은 물'이라 부르던 시대는 아니었다. 그런 선배들의 영향을 받긴 했으나 굳이 말하면 그쪽은 아니었다. 그때도 취업에는 토익이나 토플 점수가 필수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영어 공부는 하기 싫었다. K 선배형이 머지않아 자동번역기가 개발되어 모든 언어 장벽은 사라질 거라고 했다. 믿고 따르던 선배였지만 그 말만큼은 믿지 않았다. 내심 그렇게 되기를 바랐지만, 우리네 삶이란 간절히 원하는 건 얻을 수 없도록 설계되지 않았던가!  


 영어와 벽을 쌓고 살던 내가 외국계 기업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암기력' 덕분이었다. 고등학교 때 연습장에 색색 볼펜으로 낙서하듯 써가며 외웠던 단어들이 제법 쓸모 있었다. 피타고라스 정리를 써먹을 일은 없어도 영어 단어는 하나가 아쉬웠다. 외국인 대표이사한테 첫 영어 프레젠테이션 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약 10페이지가량 되는 발표 내용을 한글로 쭉 써본 후 영작했다. 문법에 맞는지는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마구잡이로 영작한 문장들을 밤새도록 달달 외웠다. 발표 당일, 혹시라도 까먹지는 않을까 암기했던 문장들을 대표이사한테 마구 토해냈다. 프레젠테이션은 그럭저럭 잘 끝냈지만 대표이사 질문은 받지 못했다. 암기식 공부의 한계였다.


 첫 해외 출장지였던 싱가포르에서의 창피한 순간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교육과 토론을 병행하는 워크숍 방식이었다. 마케팅 용어는 평소에도 자주 사용하니 교육 시간은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저녁 만찬 때가 문제였다. 다양한 주제를 영어로 이야기하니 따라가기 벅찼다. 30분이면 먹는 저녁을 수다 떠느라 세 시간이나 끌었다. 갈수록 과묵해지는 나를 발견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때 옆에 앉은 말레이시아에서 온 동료가 '노블 프라이스' 이야기를 했다. 맥락 없이 나온 노블이 뭔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반복해 이야기했는데 이해하지 못하니 호응해 줄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에 관한 이야기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요즘도 가끔 그 상황이 꿈에 나온다. 


 10년 차쯤에는 파리로 출장을 갔더랬다. 4박 5일 동안 전 세계에서 온 동료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는 자리였다. 영어 능력보다 10년 직장생활 내공이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초반에 강하게 밀어붙이는 게 필요했다. 첫날 첫 시간에 주제 발표를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다행히 쉬운 주제였다. 먼저 발표하고 나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도 저녁 만찬은 괴로웠다. 각국을 대표하는 수다쟁이만 모였는지 도대체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야기를 주도하지는 못해도 말없이 구석에 숨어 있지는 않았다. 10년 동안 한 우물을 판 짬밥과 신의 경지에 이른 눈치 덕분이었다. 마지막 날 모든 일정이 끝나고 죽이 잘 맞던 러시아와 브라질 동료들이 파리 시내 유명한 클럽으로 놀러 가자고 했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I don't want speak English any more." 


 서바이벌 잉글리시로 근근이 버티던 내 영어 실력이 월등히 좋아지는 계기가 있었다. 양자역학 용어로 '퀀텀 점프' 같은 순간이라고나 할까? 해외 출장 가면 가끔 만나던 아일랜드 동료가 우리 회사 마케팅 디렉터로 왔다. 심성이 착하고 매너 있어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어찌 보면 불편할 수도 있었다. 가끔 보는 편한 동료가 보스로 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동료(보스)가 "영어는 네 모국어가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해."라고 말해주었다. 둘이 대화할 때면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게 쉬운 단어를 골라 이야기했다.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질문하라고 했다. 편안한 분위기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영어 실력이 향상되었다. 상명하복의 군대 문화가 익숙했던 우리는 보스 (사장이나 임원) 앞에 가면 영어든 우리말이든 자연스럽게 말 꺼내기가 어려웠다. 하물며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보고를 하고 결재를 받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보스가 스스로 나서 그런 분위기를 깨 주자 이제 막 말의 재미를 느낀 어린아이처럼 영어로 수다 떠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나라 10년(최소 6년) 영어교육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 외국인 동료의 친절함과 배려 덕분에 해냈다. 비밀은 '편안한 분위기'였다. 마음이 편안하면 '용기'를 낼 수 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평소에는 영어 한 마디 못하다가 술 한잔 마시면 술술 영어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입 밖으로 쏟아지는 기적을. 술은 용기를 북돋아준다. 영어는 언어다. 언어는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문법에 조금 맞지 않더라도 의미만 통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지레 겁먹고 어떤 단어가 적당한지, 문법에는 적절한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입 밖에 뱉어 놓으면 말이 된다. 실수하면 다시 하면 그만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어학연수나 유학을 가지 않더라도 영어를 잘하는 비결 중 하나가 바로 언어(영어) 용기의 내재화가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둘째 아이가 영어를 잘하는 순간은 아빠가 숙제를 얼마나 잘했는지를 검사할 때가 아니라 스스로 공부할 때다. 스스로 공부하는 법이 좀처럼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마음먹고 자리에 앉으면 '저렇게 잘 읽었나?' 싶을 정도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사실 둘째 아이가 우리 가족 중에 영어 발음은 가장 좋다. 오늘 함께 영어 공부하다 둘째 아이를 혼냈다. Constitution을 발음하지 못해서, 어제 열 번도 넘게 알려준 뜻을 까먹어서였다. 솔직히 나도 이 단어의 의미가 '헌법'이라는 걸 어제서야 알았다. 미안해, 큐. 아빠가 늘 알던 단어처럼 굴어서. 



 

 퀴즈의 정답을 공개한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초등학생의 순수한 마음으로 풀면 세 문제 모두 충분히 맞힐 수 있다.   


 첫 번째, None 옆에 있는 것은 밭 전(田)이다. '논[nʌn]'이라고 발음하기 위해 밭이라는 한자를 써 놓았다. 

 두 번째, Whisper 옆에 그린 그림은 유령이다. 아이들이 한창 즐겨 보던 '요괴 워치'라는 만화책에 등장하는 유령 캐릭터 이름이 바로 <위스퍼>다. 

 세 번째, Together 옆 그림은 눈치챘겠지만 아이스크림이다.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투게더>다.


 이렇게 유추에 유추를 거듭해야 읽을 수 있다면 차라리 그냥 발음을 외우는 게 쉽지 않았을까? 정말 엉뚱한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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