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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Aug 26. 2021

아버지의 속담 수업

한뼘소설

1997년 교토의정서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 

2035년 베른기후재앙협정 

2060년 서울기후협약 


너도 이 목록들 보이지? 우리가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어. 이 점은 너도 알아주면 좋겠어. 그래 맞아. 솔직히 처음 두 번은 말만 거창할 뿐, 아직은 너무 먼 머래의 지구나 얼굴도 모르는 후대를 위해 이윤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기꺼이 포기할 나라들이 거의 없었어. 존재 목적이 이윤 추구인 기업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ESG 경영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잖아. 마치 뜨거운 아이스커피처럼 말이야. 그럴싸한 숫자 놀음으로 시민들에게 헛된 희망을 던져주고 '착한 소비'가 정답인양 부추겼지만, 결국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토해냈지. 아직 시간이 있었을 때, 무언가 의미 있는 행동을 해야만 했던 순간을 그만 놓쳐버린 거지.  


그러다 '그날'이 온 거야. 급직적인 기후과학자들이 목이 터져라 경고했던 바로 그 사건 말이야. 그것도 예상보다 몇 년이나 빨리. 세상을 알기엔 그때의 나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왠지 그 사건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나지 뭐야. 요즘도 지옥 같던 그 하루가 꿈에 나와. 그런 날은 잠자는 건 포기해야 해. 어떻게 그런 대규모 재앙이 연이어 일어났는데 아무도 미리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을까? 수천 개의 인공위성이 1초도 쉬지 않고 지구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말이야. 바닷물이 순식간에 불어나 해안가 마을들이 감쪽같이 사라졌어. 사람들이 대피했냐고? 아마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을 거야. 그나마 우리나라는 형편이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야. 이웃 나라들은 면적의 30%가 잠겨서 난리도 아니었데. 그날을 시작으로 극지방은 점점 더워졌고 적도지방은 점점 추워졌어. 병든 지구가 썩은 고름을 토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온 세상이 알 수 없는 악취로 진동했어. 1년 동안 산불이 꺼지지 않는 지역, 1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지역이 수두룩했어. 지진과 태풍은 매번 스스로의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어.  


2035년, 그때까지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나라의 대표들이 만년설이 사라진 스위스에 모였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자는 의미 없는 말은 그 누구도 하지 않았어. 너무 뜨거워진 지구를 급하게 식힐 방법을 찾아야 했거든. 지구 공학자들이 회의를 주도했어.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미치광이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인데 말이야. 그들이 제시한 방법은 기발했지만 위험이 따랐어. 천문학적인 비용도 필요했지. 그토록 호되게 지구의 경고를 들었건만 각 국의 대표들은 자기들 입장만 목이 터져라 외쳐댔어. 결국 속은 텅 비고 포장지만 예쁜 크리스마스 선물 꾸러미처럼 의미 없는 단어들만 가득한 선언문이 채택되었어. 마지막 기회마저 놓친 거지. 


기후 관련 마지막 국제회의가 열린 건 2060년이었어. 우리나라에서 열렸는데 참가한 나라는 고작 30개국 정도밖에 안됐어. 대다수 국가들은 시스템이 붕괴되고 폭동이 일어나 무정부 상태였거든. 2059년은 역사적으로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되었어. 기후위기 논의가 활발했던 2020년에 비해 평균 기온이 무려 5도나 올라갔거든. 결국 여섯 개의 시나리오 중 가장 비관적인 상황이 현실이 된 셈이지. 바다가 육지의 50%를 덮어버렸고 지구 인구도 3분의 1만 살아남았어. 위대한 인류가 건설했던 바벨탑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파괴됐어. 그런데 그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아? 지구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어. 어떻게 알았냐고? 그냥 그렇게 느껴졌어. 당장 나만해도 숨을 쉴 때 더 이상 목이 따끔거리지 않았거든. 산소마스크를 벗어도 멀쩡했어. 2060년을 정점으로 온실가스는 조금씩 줄어들었어. 그럴 수밖에 없잖아. 이제 인간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워낙 많은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켜켜이 쌓여 대가속이 시작된 20세기 말의 상태로 돌아가려면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이 걸려야 할지도 모른데. 이제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속담의 뜻을 알겠지?   


아들아, 근데 그거 알아? 옛날 사람들은 핵전쟁이 인류를 재앙으로 이끌 것이라고 걱정했었데. 참, 우습다. 그지? 결국 인류를 멸망으로 이끈 건 멈추지 못한 '풍요' 때문이었는데 말이야. 아빠의 꿈이 뭔지 아니? 너에게 다시 '눈'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야. 맞아, 차갑고 예쁜 결정이야.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야. 뭐라고? 이럴 때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는 속담이 어울린다고? 오, 우리 아들 대단한데!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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