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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Sep 08. 2021

양육의 나비 효과

스마트폰 말고 가끔은 그림책

 한 부모에게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성격도 취향도 사뭇 달랐다. 어떻게 저렇게 다를 수 있을지 혀를 내두를 때가 종종 있다. 식사 끝나고 아이들이 앉았던 자리만 봐도 두 아이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첫째 아이가 앉았던 자리는 언제나 지저분하다. 참 꼼꼼히 흘린다. 도저히 흘릴 수 없는 음식도 여지없이 그랬다. 반찬과 첫째 아이 밥그릇 사이에는 언제나 추적 가능한 선분이 그려졌다. 재주라면 재주였다. 둘째 아이는 어떤 음식을 먹어도 식탁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에 앉아서 밥 먹은 거야?' 할 정도로 깔끔했다. 마치 비 온 후 미세먼지가 사라진 가을 하늘 같았다. 젓가락질을 제법 잘하는 아빠도 가끔 반찬을 흘리곤 하는데 아직 젓가락질이 서툰 둘째 아이는 실수하는 법이 없다. 물론 젓가락보다 숟가락을 더 많이 사용한다는 게 함정이다. 앉은자리뿐만 아니라 밥그릇도 확연히 차이 난다. 첫째 아이는 밥알이 묻어 있는 건 예삿일이고 매번 조금씩 남긴다. 둘째 아이는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비운다. 물론 남기는 일도 드물다.  


 똑같이 우리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부모에게서 각각 50퍼센트씩 유전자를 물려받는다. 그렇다면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나 아니면 아내, 둘 중 하나를 닮았다? 물론 그렇지 않다. 나와 아내는 각각 부모님으로부터 50퍼센트씩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각각의 부모님은 당신들의 부모님으로부터 50퍼센트씩 물려받았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정답은 모르겠다. 아니, 솔직히 <이기적 유전자>는 너무 어렵다. 몇 개월이 지나도록 이 책을 완독 하지 못하는 이유다. 아무튼, 아이들의 이런 차이가 유전자의 영향이라기보다 후천적인 요소(교육, 학습, 생활습관 등)때문에 기인한다고 믿는다. 유전자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보고 듣고 느낀 것으로 설명할 수밖에.  

  

 첫째 아이가 이유식을 시작할 무렵 우리 부부는 아이가 스스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려고 노력했다. 작은 식탁 기능이 있는 유아용 의자에 이유식을 놓아주면 아이가 혼자 힘으로 먹었다. 그렇다 보니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것, 아니 흘리는 것이 더 많았다. 식탁 주위뿐만 아니라 주방 전체가 흘린 이유식으로 가득했다. 나중에는 바닥에 아예 방수포를 깔기도 했다. 그렇다고 첫째 아이가 음식으로 장난을 치거나 버리는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열심히 먹고 열심히 흘렸다. 그렇게 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식사 시간도 즐겁기를 바랄 뿐이었다. 


 둘째 아이가 이유식을 시작할 무렵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엄마 혼자 두 아이를 돌봐야 했다. 아빠는 두 아이가 저녁 먹는 시간까지 퇴근하지 못했다. 첫째 아이 때처럼 식탁과 주방을 전쟁터로 만들면 두 아이를 동시에 보살필 수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둘째 아이 이유식은 대체로 엄마가 먹였다. 먹성이 좋던 아이는 조금도 흘리지 않고 잘 받아먹었다. 자기 스스로 숟가락을 들고 밥 먹기 시작했을 때 신기하게도 둘째 아이는 거의 음식을 흘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유식을 먹이던 방식이 현재의 테이블 매너를 결정했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어딘가에서는 태풍을 일으키기도 한다. 과거에 우리 부부가 한 어떤 선택이 오늘의 아이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다. 사실 식탁에 음식 흘리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세상은 더없이 편리해졌다. 그중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유아를 둔 초보 부모들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로 일상을 빼앗기기 전, 그러니까 까마득한 옛날에는 외식이란 걸 자주 했다. 원래 아이들이란 낯선 환경에 가면 얌전히 앉아 있기 힘든 법.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울고 보채기 일쑤다. 그럴 때 스마트폰을 꺼내 아이 앞에 놔주면 만사 오케이다. 아이는 평화를 찾고 부모는 모처럼의 외식을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다. 식당을 이용하는 다른 손님들이 눈살을 찌푸릴 일도 없으니 이렇게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이 또 있을까? 잡스 형님과 아이코닉스(뽀로로를 탄생시킨 회사 중 하나) 대표님께 넙죽 큰절이라도 해야 마땅했다. 노벨 평화상 감이다. 우리도 아이들과 외식할 때면 의례히 태블릿 PC부터 챙겼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에는 항상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 영화를 보여주었다. 

한 달이면 사흘 정도는 아이들한테 부대낄 수밖에 없는데,
뭐 그렇게 견디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지요.
그저 거실에다 몰아넣곤 벽면 텔레비전 스위치만 켜 주면 그만이니까.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에 나오는 대사 일부다. 책이 사라지고 텔레비전을 통해 순간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그리 멀지 않은 가상의 미래를 그린 작품이다. 화씨 451의 세계관에서 부모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한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간혹 아이를 낳더라도 학교(사회)가 책임진다. 한 달에 겨우 사흘만 부모와 지내는데, 그때에도 부모는 아이와 이야기하거나 교감을 나누는 것이 아니고 거실에 몰아넣고 텔레비전을 켜 준다. 이 대목을 읽는데 왠지 가슴이 철렁했다. 


 코로나 상황에 모처럼 아내와 단 둘이 외출을 했다가 식당에 들렀다. 아크릴 칸막이가 설치된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하나같이 스마트폰을 보느라 정신없었다. 그런데 유아(20개월 내외로 보이는)를 동반한 젊은 부부가 유독 눈에 걸렸다. 아이는 태블릿 PC로 애니메이션을 보고 엄마, 아빠는 식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10년 전 우리 부부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화씨 451>을 읽은 때문인지 테이블 양 옆으로 막힌 아크릴 칸막이보다 젊은 부부와 아이 사이에 보이지 않는 칸막이가 훨씬 단단하게 느껴졌다. 아이도 부모도 각자의 섬에서 고립되어 있는 듯했다. 물론 코로나 상황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훨씬 안전한 생황 방식이기는 하다. 의도된 단절. 코로나는 우리에게 익숙한 모든 걸 변화시켰으니까. 


 그래도 이런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 손쉽게 쥐어 준 스마트폰(태블릿 PC)을 아이가 놓으려고 할까? 지금은 뽀로로가 나오고, 귀여운 아기 상어가 나오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게임을 하고, SNS를 하고…. 사람보다 스마트폰과 더 친한 친구가 되지 않을까? 손이 두 개 밖에 없어 스마트폰을 꽉 쥐고 있으면 책에 닿을 기회가 생기기는 할까?


 소극적으로 활동하는 독서 관련 카페가 있다. 가끔 방문해 읽은 책을 공유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어떤 책이 좋은지 정보를 수집하기도 한다. 그런데 신입 회원들이 들어오면 꼭 하는 질문이 있다. '책을 읽지 않는 우리 아이 어떻게 해야 하나요?'이다. 아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되는지 궁금했다. 부모 손에는 스마트폰을 쥐고 아이가 책 읽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아이와 외식을 하면 부모가 먼저 스마트폰을 내어주는 건 아닐까? 우리 부부도 태블릿 PC를 잘 활용했다. 그 대신 매일 밤마다 동화책 수십 권을 읽어 주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을 심어주고 싶었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혁신적인 기술들이 세계를 변화시킬 것이다. 정보가 쏟아지고 노동의 가치는 달라질 것이다. 디지털 시대가 가속화될수록 역설적이게도 아날로그 감성이 부각되리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 부모가 하는 작은 선택들이 아이의 미래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단지 사랑하는 내 자식이 책을 좋아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가끔은 스마트폰 대신 재미있는 그림책 한 권을 쥐어주면 어떨까? 그 그림책 한 권이 아이의 미래를 바뀔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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