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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14. 2021

전복은 못 먹어도 전복죽은 좋아합니다 (feat 해녀)

아내는 그리고 남편은 쓰다 <그림 에세이 - 제주를 그리다>

 내륙에서 나고 자란 탓인지, 원래 입 짧은 탓인지 몰라도 군대에 다녀오기 전까지 '해산물'을 잘 먹지 못했다. 항상 밥상에 올라오던 임연수나 고등어구이도 어머니가 눈치를 줘야 겨우 한 점 먹는 정도였다. 그나마 익숙한 오징어회를 제외하면 생선회를 먹는 일에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고등학생 시절, 친한 친구 생일날 친구 어머니가 비싼 광어회를 사주셨는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쳐다만 보았다. 밑반찬으로 나온 콘치즈만 실컷 먹었다. 회를 먹지는 않아도 머리째 접시에 담긴 광어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깻잎으로 살짝 덮어주었다. 친구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한참 동안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굴이나 전복은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으니 자연스레 멀리 했고 해삼이나 멍게는 실물을 본 적조차 없었다. 군대에서 애국심이 고취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적어도 '어른 입맛'으로 거듭나는 기회가 되었다. 생선구이는 말할 것도 없고 생선회까지 척척 먹는 수준에 이르렀다. 단순히 먹는 정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즐기게 되었다. '이 맛있는 걸 왜 여태껏 안 먹으려고 했을까?' 싶었다. 군대에 다녀온 보람을 엉뚱한 곳에서 찾았지만 나 자신은 꽤 만족스러웠다. 


 군 전역 후 어른 입맛으로 레벨 업했으나 아직 정복하지 못한 해산물이 그득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산 낙지, 멍게, 개불까지는 어찌어찌 섭렵했으나 생굴, 전복회, 해삼 삼대장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금단의 구역으로 남았다. 5~6년을 매해 봄 제주도로 출장 갔는데 그때마다 행사 주최 측에서 전복 전문 식당을 저녁 장소로 잡았다. 전복을 활용한 다양한 요리가 테이블에 가득 찼고 그 한가운데 주인공인 전복회가 먹음직스럽게 놓였다. 그림의 떡이었다. 다행히 테이블 한 구석에 전복 버터구이가 있어 허기만 면할 뿐이었다. 어느 날은 과감하게 전복회 한 점을 입에 넣어 봤으나 몇 번 씹지도 못하고 뱉어버렸다. 생굴이나 해삼도 상황은 비슷했다. 삼대장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딴 세상 음식임이 분명했다.  


 오래전부터 제주에 가면 꼭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가 해녀 삼춘들이 바닷가에 좌판을 깔고 즉석에서 손질해 내어 주는 싱싱한 해산물에 낮술 한잔 해보는 것이었다. 바닷가에 있는 관광지에 가면 언제, 어디에나 그녀들이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것도, 해산물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왠지 이것만큼은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춤추듯 일렁이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쓴 소주 한잔을 넘기면 삶의 온갖 시름을 잊고 잠시나마 무릉도원에 닿으리라 꿈꾸었나 보다. 그토록 자주 제주를 찾았지만 용기 내어 좌판 앞에 앉지 못했다. 그러다 한달살이를 하면서 '용머리 해안'에 갔을 때 마침내 좌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녀 삼춘들은 이제 할망이 다 되었다. 곱디고왔을 얼굴에는 시간의 무게만큼 주름이 가득했고 가냘팠을 두 손은 물질한 횟수만큼 억셌다. 아내는 나와 달리 해삼을 무척 좋아했고 아이들도 처음 먹어본 문어숙회와 소라를 맛깔스럽게 먹었다. 소박하게 담긴 2만 원 한 접시 해산물이 조금 적은가 싶다가도 나이 든 할망들이 5미터가 넘는 바다에 들어가 숨을 참아가며 잡아왔다는 걸 생각하면 2만 원은 참으로 마땅했다. 게다가 기막히게 아름다운 풍광과 해녀 할망이 들려주는 바닷속 이야기를 덤으로 얻었으니 술 한잔 걸치지 않아도 기분 좋게 취했다. 오래 벼르던 소망을 드디어 이루었다.   




 제주특별자치도 2020년 통계에 따르면 현직 해녀로 등록된 인원은 약 3천6백여 명이다. 매해 조금씩 감소하는 추세다. 1950년대 초반만 해도 해녀의 수가 3만여 명에 달했다고 하니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명맥만 잇는 셈이다. 더 심각한 것은 해녀들의 연령이다. 30세 미만은 겨우 4명뿐이고, 60세 이상이 3천2백 명을 웃돈다. 90퍼센트에 해당한다. 100세 시대인 요즘 60세는 중년에 속한다지만 바닷속 위험하고 거친 작업 환경을 감안하면 괜한 걱정은 아닌 듯싶다. 해녀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직업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주특별자치도에서도 해마다 '고령 해녀 보호와 신규 해녀 육성'을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제주에서 언제부터 해녀가 활동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발행한 <제주 해녀의 자취를 따라서>에 따르면 '물질'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섭라(제주)에서 야명주(진주)를 진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나 그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측한다. 본격적인 해녀 관련 기록은 조선 초(1449년~1451년)에 편찬한 <고려사>에 등장한다. 탐라군 관리자로 부임한 윤응균이 '남녀 간의 나체(裸體) 조업을 금한다'는 금지령을 내렸는데 이것이 해녀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이다. 남녀가 발가벗은 채로 조업을 했다는 부분에 눈이 번쩍 떠지지만 당시로서는 파도의 저항이나 물속 작업 환경을 고려해 최선책은 아니더라도 최악은 면하기 위한 선택이지 않았을까 싶다. 남자는 포작(鮑作)이라고 해서 전복을 잡고, 여자는 잠녀(潛女)라고 해서 주로 해조류를 채취했다. 점차 포작이 사라지고 잠녀가 전복 채취까지 떠안게 되는데 이는 남자들이 뱃일과 수군에 동원되면서 공물로 받쳐야 하는 전복을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귤나무가 눈물 나무가 된 가슴 아픈 사연처럼 전복 진상에도 슬픈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 중기(인조 7년, 1629년)에는 제주인들의 육지 출입을 금지하는 '출륙금지령'이 내려진다. 가혹한 세금을 견디다 못해 육지로 도망가는 제주인이 늘어나면서 군역에 동원할 인구가 줄어들자 내려진 조치였다. 남자들이 군역을 비롯한 각종 국가사업에 동원되자 전복 진상은 오롯이 해녀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전복을 제때 진상하지 못하면 태형을 받는 등 치도곤을 당했다. 영조 때 제주도로 귀양 왔던 조관빈이라는 문신이 이 모습을 보고 <탄잠수녀>라는 슬픈 글을 지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애처롭다. 전복을 워낙 자주 진상하니 잡히는 전복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한데 공물로 배정된 양을 채우지 못하면 관청에 불려 가 매를 맞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본인만 매를 맞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부모나 남편까지도 고역을 치렀다. 바다에 들어가기 위해 낙태를 하는 해녀도 있었다. 오죽하면 해녀들의 불쌍한 신세를 한탄하며 자신의 밥상에 전복을 올리지 말라고 했을까? 임금의 수라상에 오른 전복도 제주 해녀가 바다에 뿌린 눈물로 자랐다. '눈물 전복'이 아닐 수 없다.  


 잠녀 또는 잠수(潛嫂)라고 부르던 명칭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녀'로 바뀌었고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해녀는 기량의 숙달 정도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자율적인(그러나 기강은 센) 민간 조직에 군(軍)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게 심상치 않았다. 자료를 찾아봤으나 이에 대한 설명은 확인하지 못했다. 해녀 조직의 우두머리를 '대상군'이라고 불렀는데 물질 능력뿐만 아니라 리더십, 날씨와 바다를 예측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물질이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행해지는 일인 만큼 자기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는 해녀에게 대상군이라는 막중한 임무가 맡겨졌다. 


 해녀가 물질할 때 입는 옷을 물옷이라고 하는데 물옷에는 물소중이, 물적삼, 물수건이 있다. 1970년대부터는 고무옷을 입었다. 고무옷이 나오면서 추위에도 잘 견디고 오래 물속에서 작업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오랜 시간 물질하게 되면서 잠수병 같은 직업병이 생겼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는 삶의 진리는 쓸데없이 냉정하다. 바다에서 오랜 시간 작업하는 해녀들을 위한 쉼터이자 구명조끼 역할을 하는 테왁, 채취한 해산물을 넣는 망사리, 바위에 바싹 달라붙은 전복을 떼어낼 때 사용하기 좋은 빗창, 물안경에 해당하는 왕눈, 그 밖에도 소살, 골갱이, 까꾸리 등이 물질할 때 사용하는 해녀들의 도구다. 꼭 챙겨야 할 도구가 있듯이 반드시 버리고 가야 할 것도 있다. 욕심이다. 해녀는 자신의 숨만큼만 바닷속에 머무를 수 있다. 그 숨의 길이 만큼이 전복이고 성게고 미역이다. 욕심을 부려 마지막 숨을 넘어서면 물숨을 먹게 된다. '호오이' 숨비소리가 바다와 함께 부르는 생명의 노래라면, 물숨은 소리 없이 울려 퍼지는 죽음의 노래다. 해녀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성난 파도나 깊은 바다가 아니라 자신의 욕심이다. 다른 누구보다 해녀들이 그 사실을 잘 안다. 자연을 대하는 자세를 해녀에게서 배워야 하는 이유다. 



<쉬는 날, 40x50, 장지에 콜라주, 채색(분채)>

 제주에서 아내는 가끔 남자 셋만 덜렁 남겨두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제주 한달살이가 '육아 독박 중인 아내에게 자유를'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시작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내는 바쁜 일상을 쪼개 새벽에는 수영장에 다녔고, 매주 월요일마다 그림도 배우러 다녔다. 그런가 하면 틈틈이 자주 가는 해수욕장 근처 마을을 구석구석 돌아다니거나 평소 궁금했던 동네 책방, 미술관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아내가 발품을 팔아 둘러본 어촌 마을의 일상이 작품으로 담기기도 했는데 그런 작품 중 하나가 <쉬는 날>이다. 해녀들이 물질할 때 쓰는 도구들을 모처럼 쉬는 날 빨랫줄에 말리는 장면을 담았다. 처음 이 작품을 봤을 때는 목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볕 좋은 오후, 물질은 하루 쉬겠다 도구를 말리면서 지친 몸을 추스르는 해녀 할망이 떠올랐다. 최근에 이 그림을 다시 봤을 때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목가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바다도 바람도 드센 보통의 제주 날씨가 떠올랐다. 지친 몸을 추스리기 위해 쉬는 날이 아니고, 파도가 거세 어쩔 수 없이 물질하러 나가지 못하는 해녀 할망의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 사이 제주에 관한 책을 몇 권 더 읽은 탓이려니 했다. 몇 개월 후에는 이 그림에서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 궁금했다. 


 그리고 보니 비려서 입에도 대지 못하던 전복죽을 처음 먹게 된 장소도 제주였다. 섭지코지 입구에 있는 '섭지 해녀의 집'이었다. 이곳 역시 전직 해녀들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전복 내장(게웃)을 넣은 전복죽은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전복회는 못 먹어도 전복죽, 전복 버터구이는 좋아한다. 나는 전복을 좋아하는 걸까, 좋아하지 않는 걸까? 모르겠다. 중요한 문제도 아닌 걸. 나는 그냥 제주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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