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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20. 2021

행복을 깨우쳐준 중문색달 해변

때로 삶의 진리는 참으로 단순하다

 중문 관광단지는 관광자원이 풍부한 천혜의 섬 제주의 자연환경과 지리적 조건을 결합해 세계적인 휴양지로 개발하고자 1978년부터 서귀포시 중문, 대포, 색달동 일원에 조성된 이래 제주를 대표하는 관광자원이 되었다. 유수의 호텔들과 다양한 전시관(미술관, 박물관, 식물원 등), 국제 규모의 콘퍼런스가 가능한 컨벤션 센터, 쇼핑센터, 면세점 등도 모두 이곳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사람들이 왕래하지 않는 한적한 장소를 찾아다니지만, 아이들이 아장아장 걷던 시절에는 여행 기간 대부분을 중문 관광단지 내에서 보냈다. 각종 편의 시설과 볼거리, 먹을거리가 풍부했기에 어린아이를 동반한 우리 가족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유아들은 언제 어떻게 아플지 몰랐기에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제주 여행 중에 급하게 병원을 찾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이곳을 벗어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더랬다.   


 아이들이 유모차를 박차고 오로지 자신만의 의지와 근육으로 걷기 시작하면서 중문과의 거리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아이들은 인형이나 자동차를 구경할 수 있는 박물관보다 자연과 직접 만날 수 있는 바다와 산을 점점 더 좋아했다. 비로소 여행이 아이의 '돌봄'을 거쳐 다 함께 즐기고 쉬는 본래의 목적에 한 걸음 다가섰다. 그래도 가끔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던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 <초콜릿랜드>, <테디베어 뮤지엄>에 들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 반응이 어찌나 시큰둥한지 보는 내가 다 민망했다. 안 사주면 집에 가지 않겠다고 떼쓰던 곰 인형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새였다. 중문을 향하는 발길이 점점 뜸해지는 건 계절의 순환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달살이 중에 정말 오랜만에 중문을 다시 찾았다. 몇 번의 우연이 겹친 덕분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한달살이가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온 가족을 우울함의 늪에 밀어버린 때였다. 자대 복귀하는 이등병 심정도 그토록 씁쓸하지는 않으리라! 설상가상으로 같은 편인 줄 알았던 날씨도 도와주지 않았다. 날씨 요정도 맥이 빠져선지 힘을 쓰지 못했다. 우울함과 아쉬움이 극에 달했다. 현명한 아내가 가만히 앉아 있느니 '일단 어디든 나가고 보자'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제주 날씨를 마을 단위로 쪼개 검색하더니 약 한 시간 후면 금능 쪽 날씨가 쾌청해질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변화무쌍한 제주 날씨도 기상청 예보도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아내의 명령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집에서 뒹굴거리기만 할 뿐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 밑져야 본전이었다. 


 위미리 집에서 금능으로 가는 길은 주로 제1우회도로(1132 지방도)를 이용했다. 억수 같이 내리던 비가 좀 잠잠해졌지만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런 날씨가 좋아질까 불신 가득한 마음으로 아내 눈치를 살피며 제1우회도로에 올랐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중문 일대에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췄다. 아내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노라며 중문 관광단지로 방향을 돌리라 명했다. 운전대를 잡은 나는 기왕 금능에 가기로 했으니 그곳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의견을 피력했다. 지그시 눈을 감은 아내는 다 계획이 있으니 중문으로 가라고 낮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금능에 들르고 싶은 눈치였지만, 더 이상 고집 피울 수 없었다. 아내 말에 순응하는 건 삶의 진리요, 생존을 위한 황금률이었다. 


 계획에 없던 중문 관광단지를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아내는 호기롭게 별다방 캐러멜 마끼아또와 바나나 프라푸치노를 한 잔씩 돌렸다. 한달살이 이후 처음으로 누린 호사였다. 별다방에 앉아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데 근사한 호텔 건물 뒤로 수줍은 태양이 얼굴을 드러 냈다. 아내가 소리쳤다. "저기다!" 서둘러 별다방을 나와 햇살이 닿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무지개 끝에 숨겨놓은 요정의 보물을 찾는 사냥꾼처럼 집요하게 햇살 끝을 추격했다. 햇살이 닿은 곳이 바로 중문색달 해수욕장이었다.  

 중문색달 해수욕장은 아름다운 해안 풍경과 야자수의 이국적인 모습으로 중문 관광단지에서 시작해 천제연폭포와 대포주상절리와 이어지는 곳에 위치해 있다. 본래는 '긴 모래 해변'이라는 뜻의 '진모살'이라고 불렸다. 이곳 모래는 흑색, 회색, 적색, 백색이 섞여 있어 해가 비추는 방향에 따라 그 색깔이 달라 보인다고 한다. 특히 다른 해수욕장보다 파도가 높고 잦은 편이라 서핑을 즐기는 이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국제 서핑대회도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고 긴 여름이 막바지에 이른 9월 초였는데도 제주의 환상적인 날씨 덕분인지 여전히 많은 서퍼가 파도를 즐겼다. 아내는 제대로 서핑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며 아쉬워했다. 

 중문색달 해수욕장 바닷물이 생각보다 너무 깨끗해 솔직히 좀 놀랐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단지 내에 있어 바닷물이 더럽지 않을까 선입견을 가졌더랬다. 다소 오래전 일이기는 해도 1999년 환경운동연합이 실시한 수질 환경성 조사 결과 (당시) 전국 44개 해수욕장 가운데 최고의 청정 해수욕장으로 꼽힌 이력이 있었다. 지금도 그 깨끗함을 자랑할만했다. 바닷물이 무척이나 맑고 투명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광은 또 어떤가? 제주 곳곳에서 이국적인 정취에 흠뻑 빠지게 되지만, 중문색달 해수욕장 일대를 첫째로 꼽아도 손색이 없겠다 싶었다.    

 날씨도 한몫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태양과 구름이 만들어낸 오묘한 앙상블은 그 일대를 천국으로 만들었다. 맑은 하늘 덕분에 바닷물도 유난히 맑고 투명하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양떼구름, 솜털 구름이 수놓은 하늘은 인간이 만든 언어로는 그 아름다움을 다 묘사할 수 없었다. 물놀이를 하지 않고서도 오랜 시간 바닷가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도 8할은 하늘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그 순간, 아내의 혼잣말이 귓가에 스며들었다. 자신의 과감한 결단력과 리더십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풍광을 만날 수 있었겠냐는…. 


 옛 말 틀린 게 하나 없다. '아내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속담 말이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깨달음을 얻고 최고 권력자라는 막중한 자리를 아내에게 내주었다. 그 결과 가정에는 평화가, 부부 사이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가슴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아직 더 부딪혀야 한다. 누군가의 귀띔으로 깨달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내려놓으므로 모든 것을 얻는다는 삶의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다면 당신은 행복할 자격이 있다. 아직 깨닫지 못했다면 중문색달 해수욕장에 가보길 권한다.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시도한다고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뭐라도 해야지. 행복은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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