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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20. 2021

여행자를 꿈꾸게 하는 섬, 우도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우도

 생에 첫 해외 여행지는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Kota Kinabalu) 섬이었다. 지금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관광지 중 하나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이름 한번 들어본 적 없는 생경한 섬이었다. 그런 섬에 가고 싶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가 특별하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온 회사 동료가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놓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동료는 코타키나발루가 외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천국의 섬'이라고 지나가듯 이야기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때부터 언젠가 해외여행을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그 섬에 가겠노라 마음먹었더랬다. 반년 후 해외여행 무경험자의 단순함과 용기에 한껏 고무된 채 코타키나발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천국이 있다면 정말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아름다운 섬은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아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눈길 닿는 곳마다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현지인들은 친절했고, 전통 음식은 이색적인 맛을 선사했으며 물가까지 무척 저렴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맛보기 힘든 열대과일도 원 없이 먹었다. 동료가 천국 운운했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었다. 에메랄드빛 바다, 드높은 하늘과 유난히 뽀얀 구름, 자신감 넘치는 태양, 무더운 오후를 식혀주는 강력한 스콜 그리고 설탕을 뿌려놓은 듯한 밤하늘까지 자연이 그때그때 내어주는 풍경이 모두 좋았다. 아름다운 산호 밭을 오가며 이름도 모르는 열대어들과 함께 헤엄치는 황홀함도 이때 처음 경험했다. 환상적이었던 첫 여행 이후 한 해 걸러 한 번씩 코타키나발루를 찾았지만 다섯 번째가 마지막이 되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관광객 사이에 인기를 끌면서 코타키나발루는 점점 처음 모습을 잃어갔다. 특히 생명력 넘치던 바다가 해마다 병들어 갔다. 몇 걸음만 옮겨도 예쁜 산호와 신기한 열대어들을 만날 수 있었던 바다는 언제부턴가 아무것도 없는 차가운 회색 바다로 변해버렸다. 너무 많은 관광객이 섬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코타키나발루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던 여행자로서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도망자가 되는 게 전부였다. 

<우도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왠지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

 천혜(天惠)의 섬 제주, 그리고 제주에 부속된 섬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우도를 볼 때마다 잊고 지내던 코타키나발루가 떠오른다. 우리가 사랑했던 제주의 여러 장소 가운데 우도만큼 이질적인 모습으로 변해버린 곳은 없기 때문이다. 우도는 지금의 아내와 연애하던 2000년대 초반 처음 갔더랬다. 소가 누워있는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일찍부터 소섬 또는 쉐섬으로 불렸다. 당시에는 예쁘고 근사한 카페나 레스토랑은 말할 것도 없고 허름한 식당조차 많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유행한 여행 열풍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펜션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숙박 시설도 우도에서는 막 첫 삽을 뜨던 시기였다. 그때 우도는 자연 그대로를 닮았다. 허름한 식당에서 소박하게 나온 반찬들은 정갈하고 맛도 좋았다. 외할머니처럼, 엄마처럼 주인아주머니 인심도 후했다. 구멍가게를 지나도, 기념품 가게를 지나도 우도 땅콩 한 줌씩을 손에 쥐어 주곤 했다. 화산섬인 우도 역시 농작물이 자라기 어려운 환경이라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땅콩을 심었다. 그 땅콩이 이제는 우도의 특급 관광상품이 되었다. 당시에도 이미 시골 인심 야박해졌다는 말이 흔했지만, 다행히 우도는 피해 갔다.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도 편안하게 쉬었다 가는 쉼터 같은 장소가 바로 우도였다. 


 우도의 밤은 무서울 정도로 컴컴했다. 민박집을 조금만 벗어나도 정말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자 친구(아내)와 밤마실 나왔다가 무심코 눈을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만 밤하늘에 흰 설탕이 촘촘하게 박혀있었다. 무수한 별들을 보고 그만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다.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무척이나 순수했더랬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토록 많은 별을 본 건 처음이었다. 여자 친구와 말없이 오래도록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손은 꼭 잡은 채로. 짙은 어둠이 왠지 두렵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어디까지가 나고, 어디서부터가 여자 친구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에 물들어 섬의 일부가 되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몽환적인 경험이었다.  

<중학생이 된 첫째 아이가 아장아장 걸을 때 찾았던 우도의 서빈백사>

 자연과 하나가 되었던 경험을 아이들과도 나누고 싶어서 제주에 갈 때마다 우도에 들렀다. 그런데 우도를 찾을 때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갈수록 찾아오는 관광객이 늘어나니 덩달아 건물들도 하나둘 늘어났다. 자연을 닮은 섬 우도가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도시처럼 변해갔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여행자를 위한 공간은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로 채워졌다. 언제부턴가 우도 입도가 즐겁지 않았다. 행복하지 않았다. 성산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다 한달살이 중에 오랜만에 우도를 다시 찾았다. 유모차 타던 둘째가 5학년이 되었으니 시간의 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새 우도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우도의 자연은 예전 그대로였다. 홍조단괴로 이루어진 서빈백사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우도봉 남동쪽 해안절벽에 소의 콧구멍을 닮았다고 해서 검은 코꾸망이라 불리던 동안경굴과 그 앞 검은 해변이라는 뜻의 검멀레도 감탄사를 자아냈다. 아이들과 물놀이하기에 그만인 하고수동 해변, 짓궂은 소나기가 쏟아지면 꼭 가야 하는 비와사 폭포도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우도 절경은 그대로인데, 그곳은 우도가 아니었다. 내 기억 속 우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페달을 계속 돌리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자전거가 우도와 잘 어울리는 탈 것이었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우도의 여백들이 빈틈없이 채워졌다. 화려하고 예쁜 건물들도 많이 들어섰다. 일부 카페와 식당은 SNS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다. 여전히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인기 있는 섬임은 분명했다. 외부 차량 반입 제한 조치로 렌터카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전기 자전거와 미니 전기차가 정겨운 올레길을 가득 메웠다. 작은 섬에는 사람도 물건도 너무 많았다. 편리함으로 가득 찬 공간이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우도는 가장 불편한 섬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우도를 찾는 관광객들 얼굴이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누구도 웃지 않았다. 덥고 습한 날씨 탓에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극심한 교통난과 과도한 경쟁,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상술로 관광객의 발길을 돌리게 한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버렸다. 우도가 걱정되었다. 우도도 좀 쉬면 좋겠다 싶었다. 숲과 멀어져 회색 건물에 둘러싸여 사는 인간이 자연과의 교감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아파서 신음하는 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인간은 자연에서 위로받고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여행은 자연의 일부인 우리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진지하면서도 동시에 즐거우면 좋겠다. 우도를 찾는 여행객의 얼굴도, 그들을 맞이하는 주민들의 얼굴도 웃음으로 가득 차면 좋겠다. 자연과 공존하지 않으면 인간의 행복은 오래갈 수 없다. 코로나는 아주 약소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한때 우려했던 일들은 언제나 현실이 되지 않았던가! 우도와 우도 주민, 여행자까지 다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조심스럽지만, 입도 인원 제한이든 사전 예약제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우도를 사랑하는 여행자라면 기꺼이 동참하리라 믿는다. 더 늦기 전에 모두가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여행자를 꿈꾸게 해 주었던 우도가 예전 모습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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