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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20. 2021

구름도 바람도 쉬어 가는 비양도

불멍, 하늘멍 못지않은 섬멍

<구름모자를 쓴 비양도>

 제주에 가면 가장 많이 찾는 바닷가는 언제나 서쪽 바다의 여왕 '협재 해수욕장'이었다. 너른 백사장과 얕은 수심, 그리고 따뜻한 제주 바다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토종 물고기들 덕분에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 하기에 그만이었다. 언제부턴가 하나둘 네모 반듯하게 잘 지어진 건물들이 생겨나고, 넓디넓은 모래사장이 사람들로  빽빽하게 채워지면서 자연스럽게 발길이 뜸해졌다. 한때라는 말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때 여왕의 해변은 무척이나 정겹고 아름다웠다. 고즈넉한 분위기도 좋았더랬다. 오래된 구멍가게에서 점심으로 내놓는 성게국수도 일품이었다. 무엇보다 여왕 품에 안겨 정면을 바라보면 덩그러니, 무심한 듯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은 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개구쟁이 아이들과 물놀이하기에 정신없던 시절에는 그 섬에 미처 눈길이 닿지 못했다.


 한달살이를 하면서 발견한 제주의 숨은 보석 중 하나가 협재 옆에 나란히 자리 잡은 작은 바닷가, '금능'이었다. 인파가 몰리는 협재를 피해 한적한 해변을 갈망하던 우리 가족에게 우연처럼 운명처럼 금능이 왔다. 금능 해수욕장은 호시절(好時節) 협재를 닮았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좋았다. 그리고 마침내 금능에서 섬 속의 섬, 오래전부터 우리를 기다리던 비양도와 마주했다. 바람 많은 제주지만 바람마저 쉬었다 가는 섬. 마침 작은 구름 하나가 비양도 위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렀다. 산할아버지가 구름 모자를 썼다는 옛 유행가 가사가 떠올랐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멍', '하늘멍'은 가끔 해봤는데 '섬멍'은 처음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초 단위가 아니라, 더 작게 쪼개져 무수한 편린들로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언제부턴가 잊고 살았던,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삶의 여백' 같은 무언가가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평소에는 티격태격하면서도 물놀이할 때만큼은 합이 척척 맞아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숨넘어갈 듯 웃어대는 아이들, 오랜만에 육아와 가사 노동의 늪에서 해방되어 오롯이 자신의 시간을 즐기는 아내가 곁에 있었다. 오후의 고즈넉한 풍경에 감사했다. 한 마디 인사조차 주고받지 않았는데 비양도는 비움의 시간으로 행복을 선물해 주었다. 


 비양도(飛揚島)는 하늘을 날아온 섬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전설일 뿐 제주도처럼 바다에서 솟은 화산이다. 금능과 협재 바닷가에서 손 내밀면 닿을 듯 가까이 있지만 실제로는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사리 때는 500m 이상 걸어 들어갈 수 있으니 1km 이내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직선거리로는 협재와 가깝지만 비양도로 들어가려면 한림항에서 배를 타야 한다. 얼마 전까지 협재에서 비양도까지 왕복하는 수영대회를 열기도 했는데 코로나 때문인지 열리지 않고 있다. 수영에 진심인 아내가 언젠가 참가하리라 벼르고 있는 대회 중 하나다.   


 하늘에서 비양도를 보면 거의 원형에 가깝다고 한다. 동서 길이와 남북 길이가 거의 차이 나지 않는 셈이다. 섬 전체 면적은 약 0.6 평방킬로미터, 둘레는 3.5 킬로미터다. 섬 중앙에 있는 비양봉은 해발고도 114 미터. 비양봉을 오르고 섬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2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금능에서 보면 봉우리 두 개가 보이는데 큰 봉우리 정상에 하얀 등대가 있다. 비양도에서 본 한라산이 그렇게 수려(秀麗)할 수가 없다고 한다. 비양도에 꼭 가봐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옛날에는 비양도를 죽도(竹島)라고 부를 정도로 대나무가 많았다. 지금은 띠가 온 산을 덮고 있다. 띠는 볏과에 속하는 풀로 제주에서 ‘새’라고 하는데 초가지붕에 얹는 풀이 바로 이 띠다. 비양도는 제주에서 가장 어리다. 마지막 화산활동을 통해 탄생한 섬이다. 학교 다닐 때 몇 번은 들어 봄직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의하면 고려 목종 5년 (1002년) 6월에 '제주 해역 한가운데에서 산이 솟았는데 산꼭대기에서 구멍 네 개가 뚫리고 닷새 동안 붉은 물이 흘러나온 뒤 물이 엉켜 기와가 됐다'라고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최근 지질조사에서는 비양도가 최소 2만 7천 년 전 탄생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제주, 오름, 기행 / 손민호 지음 / 북하우스) 비양도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겠지만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보면 그만큼 평소와는 다른 것들이 보인다. 바닷가에 구르는 돌 하나에도 시간의 깊이와 의미가 새겨져 있는 곳이 제주 아니던가!


 제주에 속한 부속섬으로 사람이 사는 섬은 모두 여덟 개다. 그중 비양도는 관광객이 가장 찾지 않는 섬이다. 덕분에 여전히 자연 그대로를 닮았다. 연간 200만 명 이상 찾는 우도에 비하면 비양도는 한가하다 못해 무료한 섬이다. 역설적이게도 일에 치여 사람에 치여 쉬기 위해 애써 찾은 제주에서도 관광객이 많은 장소에 언제나 더 많은 관광객이 몰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제주도민들만 아는 한적한 장소만 찾아다니는 관광객이 하나둘 늘고 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한 시간을 기다려도 차 한 대가 지나가지 않는 무료함을 느끼고 싶을 때, 삶의 여백 같은 순간이 필요할 때는 나도 모르게 비양도가 떠오른다. 자연을 닮은 비양도가 지금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면서 우도로 몰리는 관광객을 분산시킬 수 있는 대안이 되어도 좋겠다. 우도는 조금 쉴 수 있어서 좋고, 비양도는 사람들에게 알려져 좋으니 두 섬 모두에게 이롭지 않을까? 제주를 아끼는 뭍사람의 속절없는 바람일 뿐이지만 이런 바람이 불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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