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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20. 2021

태초의 신비를 간직한 거문오름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생각하다

 제주도는 유네스코에서 생물권 보전지역, 세계 자연유산, 세계 지질공원으로 지정한 섬이다. 인류가 보존해야 할 중요한 문화 및 자연유산으로서 제주도의 가치를 세계가 인증한 셈이다. 세계적인 기구가 그 가치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제주에 갈 때마다 천혜의 아름다움과 섬 곳곳에 스며있는 역사적 가치를 오래도록 보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제주 모습 그대로를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해주고 싶다. 여행지로 가끔 제주를 찾는 뭍사람의 욕망이 투영된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랬으면 좋겠다, 제주는 딱 지금의 제주이기를. 도대체 공신력 있는 국제기구인 유네스코가 제주의 어떤 모습에 반해 자연환경 분야의 타이틀을 세 개나 수여했을까? 그것이 알고 싶었다. 


 세계 자연유산이란 훼손되면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고, 인류 전체를 위해 공동으로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형의 유산을 말한다. 제주도는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었다.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암동굴로서 뛰어난 경관과 지질학적 가치가 있고, 성산일출봉은 해안 요새와 같이 극적인 경관과 화산 분출을 이해하는 가치를 지녔다. 한라산은 주상절리와 백록담과 같이 기암괴석이 발달해 있고 계절에 따른 경관의 가치가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세 구역은 제주도 전체 면적의 약 10분의 1에 해당한다.  


 세계 지질공원은 지질학적으로 탁월하고 경관이 아름다운 자연을 대상으로 역사, 문화, 생태 등의 지역자원과 결합한 지질관광을 통해 지역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제주도는 180만 년 전부터 최근까지 발생한 화산활동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자연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학술적으로도 중요하다. 2010년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 지질공원으로 인증되었다. 지질공원 범위 역시 제주도 전체이며 한라산, 성산일출봉, 만장굴을 비롯해 서귀포층, 천지연폭포, 중문대포주상절리대, 산방산, 용머리, 수월봉, 우도, 비양도, 선흘곶자왈이 대표명소로 지정되었다.


 또한 유네스코는 자연이 더 이상 인간에 의해 파괴되지 않고 더불어 공존할 수 있도록 생물권 보전지역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인간이 자연을 잘 보전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경제적 혜택을 얻고, 여기서 얻은 이익을 다시 자연을 보전하는데 이용하는 지속 가능한 공존을 추구한다는 취지다. 생물권 보전지역은 생물종이 풍부하고 청정하다고 인정한 곳으로 국제적으로 많이 알려질 뿐만 아니라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재배한 친환경 생산물들을 더 많이 판매할 수 있다는 장점도 가진다. 우리나라에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설악산, 신안 다도해, 광릉숲, 고창군 등 다섯 곳이 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거문오름은 태초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했다.>

 제주 여행을 할 만큼 해서 안 가본 곳은 더러 있어도 모르는 곳은 없다고 자부했는데, 거문오름은 이름마저 생소했다. 제주에 대한 사랑이 남편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검색의 여왕 아내도 금시초문이란다. 한달살이를 시작하면 거문오름부터 한달음에 달려가자고 약속했더랬다. 그런데 사전 예약 절차가 있었다. 예약한 사람에 한해 탐방이 허락되고, 탐방 시에는 해설사와 동행이 필수였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렇게 까다로워?’ 솔직히 조금 짜증 났다. 귀찮은 데 가지 말까 하다가 도대체 뭐가 있길래 그런가 싶어 마음을 다잡고 예약했다. 마침내 D-day, 얄궂은 비가 내렸다. 비장한 마음으로 비옷을 챙겨 집을 나섰다. 

<내리는 비는 더위를 식혀줄 정도로 기분 좋았지만, 거문오름의 절경을 가려 원망스러웠다.>

 궂은 날씨에도 제법 많은 사람이 모였다. 유치원 아이부터 일흔이 넘는 어르신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탐방은 정해진 시간에 해설사와 함께 출발하고 개인적인 탐방은 금지되었다. 출발하고 약 30분가량이 오르막길 코스로 가장 힘들다고 했다. 이미 설악산과 한라산 등반 경험이 있는 우리 가족에게는 가벼운 산책 정도였다. 이후부터는 분화구로 내려가는 코스라 체력적인 부담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주요 지점마다 해박한 지식을 갖춘 해설사가 재미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니 힘들다고 느낄 겨를도 없었다. 큰 기대하지 않았던 해설사와의 동행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거문오름을 예약한 뒤 나름대로 관련 책도 읽고 인터넷도 검색해 보았는데 역시 지역 해설사의 생생한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었다. 특히 거문오름이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되는 과정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사실 제주도가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제주도 이전에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곳 중에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화산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세계유산위원회는 이전에 등재된 화산지역과는 다른 '현저한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과 지구 역사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지지 않은 것을 보여줄 방법이 없으니 난감한 문제였다. 그런데 유네스코 실사단이 도착하기 직전 2005년 5월, 구좌읍 월정리에서 전신주 교체 작업 중 땅이 꺼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뚫린 구멍 아래서 태초부터 숨어 있던 거대한 원시 동굴이 발견되었다. 이 동굴이 ‘용천동굴’로 용암동굴이 석회암 동굴의 특성까지 가지고 있어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지질학적 가치를 지녔다. 하늘이 제주도를 도왔다는 말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곳에 도착한 실사단은 입구에서 겨우 몇 미터만 들어가고도 가치를 인정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용천동굴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해 조사단도 더는 들어가지 않았다. 세계가 인정한 가치를 지닌 용천동굴을 비롯해 이 일대 화산 동굴을 낳은 모체가 바로 거문오름인 것이다. 왜 거문오름 탐방 절차가 까다롭고 개인 탐방이 금지될 수밖에 없는지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나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거문오름 곳곳에는 화산활동의 흔적, 패망 직전 일본의 활동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다.>

 거문오름 탐방로는 약 5.5km로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이후 약 1시간 정도 능선을 걷는 코스는 탐방객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거문오름의 진면목은 굼부리(분화구)를 내려가면서 시작된다. 태초의 원시림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약 300여 종의 식물들이 거문오름 원시림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굼부리 일대는 화산활동 중 분출한 용암류가 만들어낸 불규칙한 암괴 지대로 숲과 덤불 등이 다양한 식생을 이루는 곶자왈 지역이다. 일 년 내내 기후가 일정하여 아열대, 난대, 온대 기후의 식물이 공존한다. 그냥 지나쳤을 나무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다 보니 재미있는 식물 이야기가 되었다. 한 공간에서 다양한 기후의 식물들을 보는 것 역시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곳곳에서 원시 화산 활동으로 발생한 화산탄(용암의 거품 덩이가 공중에서 굳어져 땅에 떨어진 것)도 볼 수 있다. 거문오름에도 아픈 역사가 스며있다. 원시림으로 무성하게 덮여있던 탓에 일본이 태평양전쟁 때 군사시설로 만든 갱도 진지, 병참도로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탐방을 마침 즈음 깊이 35m 규모의 선흘수직동굴이 있다. 바로 이곳에서 거대한 용암이 분출되어 거문오름 용암동굴계가 탄생한 것이다. 까마득한 높이에 기분이 아찔하기도 하지만, 위대한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진 촬영하느라 잠시 일행과 떨어지게 되었다. 왠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행을 향해 뛰었다.>

 탐방을 끝낼 때까지 계속 비가 내렸지만 거문오름 탐방은 기대 이상이었다. 해설사와 함께 탐방하며 제주의 다양한 역사와 전설을 실감 나게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원시림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솔직히 사진 찍느라 일행과 떨어졌을 때는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얼마나 자연 그대로 잘 보존했는지 실감했다. 거문오름을 탐방하기 위한 까다로운 절차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자연에게 이로운 선택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인간은 자연이 내어주는 혜택을 받기만 하는 존재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이처럼 더 달라고 졸라대기만 한다. 거문오름에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너무 뻔한 결말일까? 사실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다만 그 정답대로 행동하지 않을 뿐. 기후변화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일, 다른 나라의 일이 아니다. 눈을 질끈 감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지구와 인류를 위해 무언가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오늘뿐이다.   


 온종일 내린 비로 원시림에 내려앉은 짙은 안개가 거문오름에서만 볼 수 있는 중산간 지역의 아름다운 풍광들을 전부 가렸다. 거문오름의 진면목을 절반만 보고 온 셈이다. 날씨 좋은 날, 한라산 정상에서 낮잠 자는 설문대 할망 얼굴까지 보일 정도로 눈 부시게 맑은 날 거문오름을 다시 찾기로 마음먹었다. 태초의 신비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원시림과 옛 제주인의 치열한 삶의 터전인 중산간을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했다. 제주에 가야 할 이유가 자꾸만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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