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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20. 2021

신성한 숲에 스며드는 사려니

비 오는 날 가야 더 좋은 숲길도 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어디에 가나 '학교 괴담'이 한둘쯤은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밤잠을 설치며 기다리던 운동회나 소풍 가는 날에 비가 내리면 학교 건물을 지을 때 이무기가 깔려 죽었다느니, 원래 학교터가 공동묘지였다느니 흉흉한 소문이 여지없이 아이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전국에 수천 개의 초·중·고등학교가 있으니 그토록 많은 이무기가, 만약 있다면, 죽었을 리 없고, 그토록 많은 공동묘지가 있을 리도 없는데 왜 그때는 모두가 괴상한 소문을 철석같이 믿었는지 모르겠다. 내리는 비를 탓할 수 없으니 애먼 대상을 하나 정해 실컷 원망하는 게 마음 편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책상을 뒤로 민 교실 한가운데서 눈물 젖은 김밥을 먹으며 날씨가 삶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지 온몸으로 느끼던 시절이었다.  


 1년에 3분의 1만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제주에서도 우리 가족은 날씨 운이 제법 좋은 편이었다. 한 번은 늦은 여름 찾아온 태풍으로 비행기가 결항되네 마네 했는데, 우리가 제주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잔뜩 인상을 찌푸렸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때부터 아내는 자신을 태풍도 잠재우는 날씨 요정이라 불렀고, 그 여행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한라산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정상 등정 인증서를 손에 쥔 건 덤이었다. 또 언젠가는 여름휴가로 머물렀던 일주일 내내 날씨가 너무 좋아 제주에 가뭄이 드는 건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다. 세상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우리 바통을 이어받은 직장 동료는 제주에 머무르는 휴가 기간 내내 하루도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비 내린 게 내 잘못도 아닌데 괜히 미안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찍은 사진은 한 장 한 장이 인생 사진으로 남았다. 이 정도면 뭍사람에게 쉬이 마음을 내주지 않는 제주 날씨와 궁합이 잘 맞는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제주와 환상적인 날씨 궁합을 자랑하는 우리 가족도 갈 때마다 어김없이 비를 만나는 곳이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도 이곳에만 가면 이상하게 비가 내렸다. 다섯 번에 네 번은 비를 만났으니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다. 빗방울이 드세지는 않아서 비옷을 챙겨 입거나 우산을 쓰기도 하고, 무더운 여름날에는 일부러 그 비를 온몸으로 맞기도 했다. 이제는 비 오는 길이 더 정겨운 이곳은 이름마저도 예쁜 '사려니 숲길'이다. 

<수직으로 뻗은 삼나무 속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어 본다.>

 사려니 숲길은 조천읍 교래리를 가로지르는 숲길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려니 오름'에 이르는 길이다. '물찻 오름'과도 연결된다. 평소에는 일부 구간만 개방되고 사려니 오름이나 물찻 오름까지 오르는 길은 1년에 딱 한 번만 개방된다. 매 해 5월이나 6월에 열리는 사려니 숲 에코힐링체험이 그것이다. 사려니 숲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삼나무다. 제주도에서는 1960년대부터 방풍림으로 이용되어 과수원 울타리로 둘러지거나 헐벗은 산을 숲으로 조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심었다고 한다. 어디서나 잘 자라는 속성 때문에 훌쩍 자란 삼나무들이 제주도를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다.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제주편>에 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일본 배가 대부분 삼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삼나무는 가벼운 만큼 약한 것이 흠이라 이순신 장군이 이 약점을 알고 뱃머리를 단단한 느티나무로 댄 판옥선을 만들어 적을 섬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사려니 숲길을 걷다가 이런 재미있는 역사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이보다 멋진 아빠, 엄마가 또 있을까? 여행도 공부한 만큼 더 많이 보이니 법이다.  

<물찻오름의 화구호에는 물이 흥건하다고 한다. 평소에는 오름 입구까지만 갈 수 있다.>

 사려니 숲길은 입구가 두 곳에 있다. 비자림로(1131 도로) 입구가 하나이고, 남조로(1118 도로) 옆에 있는 붉은오름 입구가 다른 하나다. 탐방객들은 비자림로 입구부터 물찻오름 입구까지 가는 코스와 붉은오름 입구에서 물찻오름 입구까지 가는 코스를 즐겨 찾는다. 두 코스 모두 편도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비자림로 입구를 이용할 경우 절물휴양림 근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사려니 숲길 입구까지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붉은오름 입구에는 제법 너른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더 편리하지만, 이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도로를 넓히고 주차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삼나무를 많이 베어버려 도민과 제주를 아끼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인간이 추구하는 경제성이나 편리함이 자연환경의 보존이라는 가치와 대립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기후변화가 더 이상 먼 미래의 일이 아닌 만큼 우리 사회도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하루빨리 모색해야 한다. 날씨가 점점 더워져 제주에서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사진 찍느라 일행과 떨어졌을 때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사려니'라는 말에는 '신성한 숲'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제주 방언으로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솔아니'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솔아니가 숲 안이라는 뜻이다. 단지 숲의 안쪽이 아니고 사람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옛 제주인들에게 사려니 길은 인간이 함부로 접근하기에는 신성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나 보다. 사실 이 숲길을 거닐다 보면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빽빽한 삼나무 숲은 불과 십 수 미터만 떨어져도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 알 수 없는 대상과 만났을 때 인간은 두려움도 신성함도 느끼게 마련이다. 물론 지금과 같은 울창한 숲은 산림녹화사업으로 조성한 삼나무와 편백나무 덕분이지만,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오래전부터 이 일대는 졸참나무, 서어나무, 단풍나무 등이 우거진 천연림이었으니 옛 제주인들이 이곳을 신성한 숲으로 여긴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듯하다. 보슬비를 맞으며 걷다 보면 온통 숲 내음이 코를 간지럽히며 숲의 일부에 스며드는 황홀경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숲인지, 숲이 나인지 경계가 없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가 사려니 숲에서는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려니 숲에는 삼나무와 편백나무 외에도 천남성, 꿩의밥, 새우난, 좀비비추 같은 다양한 식물이 서식한다.>

 유명 관광지로 주목받는 사려니 숲길도 언제나 많은 탐방객들로 북적인다.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주차할 곳이 없어 애를 먹기 일쑤다. 하지만 숲길을 따라 붉은 송이(화산석 알갱이)를 밟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주위에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탐방객들은 입구에서만 사진 찍기에 바쁘고 정작 이토록 예쁘고 운치 있는 숲길을 걷지 않는다. 고요한 숲길을 가족과 오순도순 걷는 것이 좋다가도 이렇게 좋은 걸 모르고 입구에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 마음을 나조차도 알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어쩌면 처음부터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갈 곳도 많고 먹을 것도 많은 제주지만, 사려니 숲길만큼은 꼭 시간을 내어 걸어보면 좋겠다.  

<상쾌한 공기의 맛을 경험하고 싶다면 사려니 숲만 한 곳이 없다. 이건 진짜다.>


 제주에 대해 알만큼 안다고 자신하고 제주여행에 관한 책을 오랫동안 읽지 않았지만, 적어도 '오름'에 대해서는 나의 무지를 일깨워 준 고마운 책이 있어 소개한다. 기자 출신 손민호 작가님의 <제주, 오름, 기행>이다. 제주를 제대로 여행해 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면 좋겠다. 그 외에도 이야기와 함께하는 제주기행이라는 주제로 김정숙 작가님이 쓴 <제주의 파랑새>, 제주 구석구석의 역사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는 이영권 작가님의 <제주 역사 기행>도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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