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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24. 2021

아름다운 제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영실 탐방로

날씨 요정의 탄생과 한라산 등반기 

 제주도는 약 180만 년 전에 일어난 화산활동에 의해 탄생했다. 하루아침에 짠 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제주도가 탄생하기 전 그 일대는 비교적 얕은 바다였다. 화산활동으로 인해 바다 밑에서 올라온 뜨거운 마그마가 차가운 바닷물과 만나 폭발하면서 수성 화산체들이 만들어졌다. 거친 화산체들은 세월에 깎여나가 넓은 대지가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주의 많은 자연경관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지독한 고독만이 바람과 파도를 친구 삼아 외로운 제주를 지켰다. 한라산은 20만 년 전 화산활동을 통해 만들어졌다. 화산 폭발 당시 용암의 점성이 낮아 평탄하게 흘러내리면서 동서방향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남북방향으로는 다소 급한 경사를 이루게 했다. 한라산의 지형은 풍화나 침식작용보다는 백여 차례에 걸친 화산의 분출과 융기에 의해 비교적 원지형이 생생하게 노출된 유년기의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과 더불어 서안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영실과 병풍바위, 오백나한, 왕관바위, 삼각봉, 선녀폭포, 탐라계곡 등의 절경을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용암이 갖는 주상절리(柱狀節理)의 발달과 풍화에 의한 지형적인 특징으로 한라산은 한반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날씨 좋은 날 제주에 도착하면 어디에서나 한라산이 보인다. 아내는 산보다 바다를 좋아했고 등산보다 수영을 즐겼다. 아이들도 아직 유모차 신세를 지고 있을 때라 한라산에 오른다는 건 꿈에서나 가능했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설악산 울산바위까지 오른 경험도 몇 번 있어 슬슬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마침 수영을 마스터하고 달리기에 재미를 느끼던 아내가 자신의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 검증해 보고 싶어 했다. 좋은 기회였다. 한라산 등산을 제안했고 아내도 아이들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한라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 한라산에 올랐다. 두 번은 영실 탐방로를 통해 남벽분기점까지 올랐고, 한 번은 성판악 탐방로를 통해 정상(백록담)까지 올랐다. 백록담까지 올랐던 성판악 탐방로를 오른 것은 2018년 가을이었다. 전날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 전까지도 태풍의 영향으로 항공 운항이 가능할지 몰랐다. 다행히 비행기가 이륙해 제주에 도착했지만, 강풍에 비까지 날씨가 역대 최악이라 실외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 없었다. 그냥 집에 있을 걸 괜히 왔나 싶었다. 다음 날 거짓말처럼 비가 멈추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한라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 전화했더니 다행히 입산 통제는 해제되었다. 아내는 이때부터 자신을 날씨 요정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우리는 성판악 탐방로를 통해 한라산에 올랐다. 흐린 날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쾌청해졌다. 정상 구간은 통제했었는데 마침 우리가 그 부근에 다다를 즈음 운명처럼 통제가 풀렸다. 행운까지 겹쳐 첫 도전만에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비 온 후 맑은 공기 덕분인지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게다가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찰랑거릴 정도로 물이 찬 백록담도 만날 수 있었다. 이 정도 맑은 날씨와 물이 찬 백록담까지 동시에 만나는 건 이곳을 자주 찾는 원주민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모든 게 날씨 요정 덕분이었다. 게다가 한라산 등정 인증서도 받았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성판악 탐방로는 가장 긴 코스였지만 관음사 탐방로에 비하면 오르기에 훨씬 편하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결코 만만한 코스는 아니었다. 중간에서 몇 번이나 포기하고 내려오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아내가 격려해 주었다. "정상에서 찍은 사진에 얼굴 안 나오는 사람은 각오해라!" 

 두 번 오른 영실 탐방로는 모두 한여름에 올랐다. 뜨거운 날씨였는데 우리 가족 모두 그다지 덥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나는 산을 오르는 힘듦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한라산의 풍경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수영으로 다져진 몸이라고는 해도 아이들에게 영실 탐방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물론 하는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운동밖에 없던 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오직 두꺼운 허벅지를 가진 아내만이 예외였다. 아내는 프로 산악인에 가까웠다. 출발은 항상 같이했지만, 아내가 한 시간이나 먼저 도착했다. 한 번은 첫째 아이가 아내와 보조를 맞추어 등산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했다. 산을 오를 때 아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앞만 보고 전진했다. 마치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는 듯. 뒤쳐진 아이들은 더 뒤처진 아빠를 응원하며 함께 올라갔다. 설악산이건 한라산이건 가족 넷이 나란히 등산한 적은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었다. 언제나 가족은 모든 걸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내도 산에서 만큼은 예외라고 했다. 고인물이 이렇게나 무섭다. 영실 탐방로를 통해서는 백록담까지 오를 수 없다. 가끔 영실 코스로 등반한 여행객들이 정상에 가지 못하는 것을 뒤늦게 알고 안타까워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정상에 가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영실 코스는 그 아쉬움 이상의 절경을 선사해 주니 손해라고 생각할 것은 없었다. 우리가 영실 탐방로를 통해 한라산을 두 번이나 오른 이유도 입이 떡 벌어지는 경치 때문이었다. 


 영실 휴게소를 출발하면 울창한 숲과 먼저 만난다. 시원한 계곡물도 흐른다. 비 오는 날에는 어디선가 홀연히 폭포도 나타난다는데 날씨 요정 덕분에 그런 횡재는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 짙은 숲에서 신비한 매력에 빠져 한 시간 가량 걷게 되면 서서히 푸른 하늘이 보인다. 그곳에서 병풍바위와 오백장군바위의 웅장한 비경과 마주치게 된다. 넋을 잃고 바라보면 뒤따라 오는 사람에게 추월당하기 일쑤다. 상관없다. 산을 오르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아닌 걸. 한라산이 내어주는 장관으로 실컷 눈호강을 한다. 숲의 끝자락에서 1차 고비를 맞은 아이들도 이곳에서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자연에 별 감흥 없는 아이들도 이곳에서는 한참 동안 넋을 잃는다. 쉬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구상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구상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데 전 세계에서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한다. 걷다 보면 큰 구상나무들이 종종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제주도의 강풍과 폭설 때문이란다. 구상나무는 죽음마저도 아름다워 보이지만 일종의 멸종 과정이기도 하다. 지구 온난화에 따라 고산식물이 점점 고지대로 이동하니 영실에 다다른 구상나무가 이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기 때문이다. 기후변화가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이 하나둘씩 가시화되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구상나무 군락지를 뒤로 하고 걷다 보면 아고산 식물의 천국 선작지왓이 나온다. 봄이면 진달래와 산철쭉이 꽃동산을 만드는 곳이다. 이색적인 풍경이 많은 제주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경관을 뽑으라고 하면 개인적으로 이곳을 말하고 싶다. 다른 곳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독특한 자연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정상 부근에 이런 평원이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가끔 독수리 같은 까마귀를 만나는 것도 이곳을 오르는 재미 중 하나다. 결정적인 즐거움은 지금은 사라진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먹는 컵라면과 초코파이였다. 라면에 진심인 우리 가족이 한라산 윗세오름에서 먹었던 컵라면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으니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안타깝게도 지금은 환상적인 컵라면 맛을 즐길 수 없지만, 아름다운 한라산 풍경을 후대에 고스란히 물려주려면 그 정도는 충분히 포기할 수 있다.

 한라산은 해발 1,950m의 높이로 제주도의 중앙부에 우뚝 솟아 있다. 국립공원은 정상 화구호인 백록담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4.4km, 남북으로 9.8km이며 면적은 153.386㎢이다. 1966년 10월 12일에 백록담을 중심으로 한 산록 지대가 천연기념물 제182호(한라산 천연 보호구역)로 지정되었고, 1970년 3월 24일 설악산 및 속리산과 함께 20개 국립공원 중 일곱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002년에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런가 하면 2008년에 물장오리오름 산정화구호 습지가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었다. 한라산 전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인 셈이다. 미국의 여러 국립공원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데 일부 구간은 관광객 출입을 엄격히 통제해 눈길을 끌었다. 꽤 유명한 관광명소였는데 편의시설이나 화장실도 볼품없었다. 처음에는 관리가 왜 이리 허술한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는 정책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신호등도 없는 도로에서 갑자기 차가 멈춰 무슨 사고라도 났나 확인해 보니 사슴 떼가 지나가고 있었다. 여행객들 그 누구도 경적을 울리지 않고 30분이 넘는 시간을 조용히 기다렸다. 사슴이 놀라지 않도록. 그들이 자연을 대하는 자세가 꽤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때 본 것이 전부는 아닐 테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제주를 볼 때마다 가끔 그때 생각이 난다. 우리가 놓치는 것이 있다면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되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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