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유람기 아들 둘과 제주 한달살이 이야기
아내는 재주가 많다. 잘 보이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플로리스트로 꽤 잘 나가는 숍에서 근무도 했었다. 가끔 내려주는 핸드 드립 커피도 정말 맛있다. 바리스타 자격증은 (출산과 육아로) 못 땄지만 한동안 배운 솜씨를 뽐내며 다양한 커피를 만들어 주었다. 요리도 잘한다. 장모님 음식 솜씨가 엄청나신데 역시 용장 밑에 약졸이 없는 법이다. 늦게 입문하긴 했지만 만드는 것마다 내 입맛에 딱 맞는다. 비록 내가 신혼 초에 미각을 잃어 공정성이 조금 결여된 입맛이긴 하지만 말이다. 준, 큐 형제는 엄마의 음식에 항상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내려 집안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하지만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나는 아이들에게 '착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운동은 또 어떤가? 수영대회에 나가면 메달 하나는 꼭 받아 온다. 그리고 아내는 그림도 잘 그린다. 고등학교 때 미대 진학을 목표로 그림을 그렸는데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 전공을 바꾸어야 했다. 가끔 그때를 아쉬워해 그림에 대한 열정을 다시 살려 보기로 했다. 마침 글쓰기를 내 인생의 두 번째 방향으로 정한 나와 함께 부부가 그리는 그림책 같은 것을 만들어 보면 좋을 것 같았다.
제주 한달살이는 아이들과 함께 실컷 재미있게 노는 것이 가장 중요했지만 부모의 마음도 그걸 허락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어야 했다. 특히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만의 시간과 20년 간 잠자고 있던 예술적 감성을 깨워줄 수 있는 새로운 자극이었다. 그래서 바다에서 물놀이를 할 때면 가능한 내가 아이들과 함께 놀고, 아내는 책을 읽거나 근처 책방, 미술관을 둘러보는 시간을 갖도록 했다. 하지만 제주현대미술관은 내가 온 가족이 함께 가자고 제안을 했다. 아내가 좋아할 만한 전시회도 있었고,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좋을 특별한 전시도 진행되고 있어 같이 관람하면 좋을 것 같았다. 마침 금릉 해수욕장에 왔다가 심한 파도 때문에 입수가 금지되어 제주현대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은 곶자왈 산책길을 통해 본관으로 갈 수 있다.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는 자연석 조형물이 제일 먼저 우리를 반겨 주었다. 본관에 이르면 큰 사람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설치미술가 최평곤의 <여보세요>라는 작품이다. 대나무를 일일이 엮어 만든 작품이다. 입장료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를 내고 본관에 들어서니 스탬프를 찍게 되어 있는 책자를 주었다. 미술관 안내와 함께 본관, 분관, 김흥수 아틀리에, 아트숍까지 모두 방문하면 작은 기념품을 준다고 했다. 좋은 아이디어였다.
본관에서는 김흥수 작가의 상설전이 진행되고 있다. 솔직히 처음 보는 작가였다. '하모니즘'이라 불리는 조형주의 이론을 실천한 작가라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눈에 보이는 세계(현실)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추상)를 하나의 화면에 조화시키는 화풍이었다. 확실히 그의 작품은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소재를 접목시켜 이질감을 주면서도 그림과 어울리는 독특한 방법이었다.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던 <2019 국제생태미술전 Ocean - New messengers>는 특별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요즘 전 지구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플라스틱의 해양오염에 대한 심각성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었다. 고래, 거북이 뱃속에서 플라스틱 쓰레기가 쏟아져 나오는 비극적인 현실을 알려주어야 했다. 이번 전시는 태평양에 접해 있는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해양환경 실태를 예술을 통해 고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해양오염의 주범인 플라스틱으로 아름다운 바다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작품도 있고, 우리 바다에서 수거한 플라스틱 쓰레기를 모아 전시한 작품도 있다. 플라스틱 조각으로 바다를 표현한 작품은 바다에게 미안한 작가의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다양한 예술적 실험들이 너무 늦지 않게 바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동안 바다에서 놀면서 무심코 쓰레기를 버리지는 않았는지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런 마음이 준, 큐 형제에게도 자라나기를 바란다. (물론 우리 아이들은 아무 데나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실수로 그럴 때면 따끔하게 나를 혼낸다.)
분관에서는 박광진 화가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역시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다. 하지만 아내는 그의 작품을 좋아했다. <자연의 소리>라는 작품 시리즈는 풍경화에 추상성을 접목시킨 작품이었다. 제주의 풍경에 수직색면을 나란히 두는 새로운 화법이었다. 나는 미술에는 문외한이지만 그의 작품에서 제주의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면 에어컨 소리였을까?)
우리는 결국 4개의 스탬프를 모두 찍었다. 종착지인 아트숍에서 작은 기념품을 주었다. 아트숍 직원분이 어린 학생들이 열심히 미술관 다니느라 힘들었겠다며 아이스크림을 주셨다. 큐는 자기가 귀여워서 아이스크림을 받은 것이라고 우겼다. 준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정말 의좋은 형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