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국어사전을 건넸다.

2월 18일, '단어는 문학의 밥'

by 조이홍

요즘 둘째 아이가 부쩍 우리말 단어 뜻을 물어보았다. 며칠 답해주다가 조금 귀찮아졌다. 사실, 모국어니까, 의미는 알겠는데 막상 설명하려니 말문이 막히는 당황스러운 순간도 제법 있었다. 보리 출판사에서 나온 '초·중등생이 함께 보는 국어사전'이 집에 있는 걸 본 기억이 났다. 애써 찾아 아이 앞에 놓아주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직접 찾아보라고 했다. 초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국어사전 사용에 관해 배우지만 아이들이 국어사전을 뒤적거리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컴퓨터를 켜고 네이버 사전이나 다음 사전을 열어 자판 몇 번만 두드리면 단어의 뜻을 금방 찾을 수 있다. 이토록 편안한 세상이라니! 하지만 아이는 요즘 이런저런 사정으로 '디지털 디톡스' 중이다.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컴퓨터나 태블릿 PC를 사용하지 않도록 멀리했다. 게다가 아무리 디지털 세상이라지만 국어사전 정도는 다룰 수 있어야 싶었다. 나름 뜻깊은 속내도 있었다. 그렇게 아이와 국어사전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좋은 글을 쓰고, 못 쓰고는 단어를 얼마나 많이 아느냐의 여부로 결정된다.
단어는 문학의 밥이다.


또 조정래 작가님을 소환하기에는 죄송스럽지만 <황홀한 글감옥>에서 본 이 말이 아이 앞에 일부러 국어사전을 놓아준 결정적인 계기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작가님은 아이와 대화할 때 일부러 쉬운 단어를 사용하지 말고 어른 어휘 그대로 사용하라고 제안했다. 이때 아이가 모르는 단어를 질문하면 함께 국어사전을 찾아보는 것이다. 단어 뜻을 찾는데 그치지 않고 어릴 시절에 많이 했던 '짧은 글짓기'를 통해 해당 단어를 응용하는 것까지 해보라고 하셨다. 아이들 글쓰기 재능을 길러주기에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으리라 확신했다. 글쓰기는 재능보다 노력이라는 조정래 작가님의 '작가론'에 흠뻑 취해있던 터라 먼지가 뽀얗게 쌓인 국어사전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유난스러운 아비 때문에 아이가 고생이다.


'짧은 글짓기'하니 문득 떠오르는 아이가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그때 짧은 글짓기가 유행이었는지 국어 시간마다 선생님이 단어를 몇 개 내어주고 글짓기를 시켰다. 보통 아이들은 정말 짧게 글을 완성했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단어가 주어졌다면, '어제 엄마가 시장에서 사과를 사 오셔서 온 가족이 맛있게 먹었다.' 정도가 아이들 짧은 글짓기 수준이었다. 그런데 유독 한 아이는 짧은 글짓기를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지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뭐 대충 이런 식이었다.


"목 빠지게 기다렸던 가을 운동회 날이다. 반 계주 대표로 뽑혀 마음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출발선에 섰다. 탕 소리와 함께 눈을 질끈 감고 힘차게 달렸다. 바람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XX야, 네가 1등이야. 정말 옆에 아무도 없었다. 우쭐대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일까? 내 발에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나 때문에 우리 반이 계주에서 꼴찌를 했다. 너무 속상해 점심시간에 좋아하는 김밥도 먹지 않고 내내 울기만 했다. 그때 엄마가 3단 도시락 제일 아래에서 토끼 모양으로 예쁘게 깎은 사과를 내미셨다. 앙증맞은 토끼 사과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엄마는 김밥 먹고 힘내서 줄다리기는 꼭 이겨야지 하셨다. 김밥이 유난히 맛있던 가을 운동회였다."


그 아이 발표가 끝나면 아이들은 손뼉 치기에 바빴고 선생님도 듬뿍 칭찬해 주셨다. 국어시간이 되면 그 아이가 이번에는 어떤 글을 지을까 모두 기대할 정도였다. 나는 그 아이가 무척 부러웠다. 그래서 그 아이를 모방해 짧은 글짓기를 짓기 시작했다. 모방에서 끝나지 않고 더 잘 쓰려고 노력했다. 아마 이것이 내 생애 처음 글쓰기에 대해 욕심이 생겼던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5학년 때, 나는 전국학생글짓기대회에 입상해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 앞으로 나가 상을 받았다. 부상도 있었는데 그것까지 기억나지 않았다. 국어사전 찾기, 짧은 글짓기 쓰기 등등 글쓰기에 필요한 노력은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영어사전 찾기의 반의 반, 아니 그 반의 반만 국어사전을 활용했다면 이미 멋진 작가가 되어 있지 않을까? 헛헛한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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