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은 패했으나 모두 승자가 되기를

3월 12일, <정원가의 열두 달>을 읽다가 5년 후를 꿈꾸었다

by 조이홍

얼마 남지 않은 독서모임 책이 가드닝 분야의 명저라는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 달>이라 좀처럼 안정되지 않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히고 읽으려 애쓰는 중이다. 저자인 카렐 차페크는 체코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이자 철학자, 기자이자 수필가로 '로봇'이라는 단어를 창시한 인물로도 널리 알려졌다. <정원가의 열두 달>은 많은 정원가들이 첫 손에 꼽는 책이라는데 나는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가드닝보다 대선 결과로 크나큰 상실감에 빠진 이들을 보듬어주는 책이라 느껴졌다. 슬픔의 마지막 단계인 '수용'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라 그렇게 느꼈는지, 아니면 이 책 덕분에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 책을 읽다가 몇몇 대목에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일조차 기약할 수 없는 불확성의 시대에 적어도 한 가지는 더욱 선명해졌다. 5년 후 우리 손으로 진짜 멋진 대통령을 뽑게 되리라는 사실을. 내게 위로가 되었던 글들이 다른 이에게도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그저 가만히 읽다 보니 어느새 흙투성이 정원가가 수선화나 히아시스, 비올라 코르누타, 허친시아, 프림로즈나 스프링 헤더가 아니라,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쓰다듬어 주고 물을 주고 뿌리를 지탱해 줄 흙을 모아주고 있었다. 축제는 끝났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으니, 이제 일상으로 복귀할 시간이라고 속삭여 주었다.


가을에 나무와 덤불들이 헐벗는 건
착시현상에 불과하다.
봄에 터뜨릴 싹과 잎사귀와 꽃으로
점점이 반짝이는 진짜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가을에 꽃이 지는 것도 착시현상일 뿐이다.
실제로는 꽃이 새로 태어난다.
우리는 자연이 휴식에 들었다고 말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정신없이 일한다.
단지 가게 문을 닫고 셔터를 내렸을 뿐이다.
닫힌 문 뒤에서는 새로운 상품을 포장하느라 손이 모자라고
진열대 위로는 상품이 빼곡히 쌓여 더 이상 놓을 자리가 없을 지경이다.
미래란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싹눈 속에 자리하고 있다.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있다.


누군가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두 눈 번쩍 뜨고 샅샅이 살펴 여차하면 다시 한번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자고 말하지만, 고백하건대 다가올 5년도 대다수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틀렸고 그들이 옳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절반은 패배했으나 모두가 승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계절이 순환하여 혹한의 겨울이 온다 해도 우리네 삶은 계속되어야 하는 법이니까.


감히 말하건대,
자연에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겨울잠에 든다는 표현도 사실 틀린 말이다.
그저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들어설 뿐.
생명이란 영원한 것.
섣불리 끝을 가늠하지 말고 인내하며 기다려보라.


이 대목이었다. 5년 후가 기다려진 이유가. 더 좋은 것, 더 멋진 것은 늘 한 발짝 앞에서 우리를 기다린다는 문장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지만, 바로 이 순간에도 현재는 과거로 밀려가고 미래는 빈틈없이 우리에게 밀려오고 있다. 시간이 무언가를 자라게 한다면 그건 정원에 핀 장미나 라벤더, 아네모네나 캐모마일뿐만 아니라 정원사, 즉 우리 자신도 성숙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바로소 깨달았다. 물론 저절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먼저 스스로 아름다워져야 한다. 그럼 우리는 또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더 좋은 것, 더 멋진 것들은
늘 한 발짝 앞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시간은 무언가를 자라게 하고
해마다 아름다움을 조금씩 더한다.
신의 가호로 고맙게도
우리는 또다시 한 해 더 앞으로 나아간다.




봄의 기운이 완연해 텃밭에 한번 나가야지 싶다가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이내 포기하다 결국 오늘 대대적인 농사 준비에 들어갔다. 겨우내 언 땅을 일구고 계분을 뿌리고 고랑을 냈다. 돌을 고르고 쓰레기를 줍고 농사에 필요한 장비들도 점검했다. 반나절 땀을 흘리고 나니 더 이상 울컥하지 않았다. 솔직히 미루었던 일을 처리하니 속이 좀 후련했다. 흙이 얼마나 변화무쌍하고 아름다운지 이해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땅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걸, 노력한 만큼만 내어준다는 걸 믿었다. 우리 삶도 그러리라는 희망의 씨앗을 보슬보슬한 땅에 살짝 묻어두었다. 곧 싹트기를 바라며.


3월12일 (9).jpg <약 1.5km 거리에 400여 개에 이르는 계단을 이 무거운 걸 들고 올랐다>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친구여, 그대는 저 구름들조차
우리 발밑의 흙만큼 변화무쌍하지도
아름답지도 경외할 만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정원가의 열두 달>에 영감을 받아 '한 평 텃밭'의 사계절을 글로 풀어 보려고 한다. 아직 어떤 글을 쓸지 방향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힘닿는 데까지 써보려고 한다. 그 글을 마무리할 때쯤이면 아둔한 나라도 흙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3월12일 (14).jpg <이제 이 한 평 텃밭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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