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어젯밤 라디오를 들으며 운전하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울컥했다. 슬픈 노래가 나오는 것도 아니요, 슬픈 사연이 소개된 것도 아니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정말 엉엉 울 것 같아서 참고 또 참았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아들, 괜찮아?" 하며 오히려 어머니가 먼저 아들의 안부를 물었다. 또 울컥했다. 평소보다 두 배는 명랑한 척, 아무것도 아닌 척, 쿨한 척 "당연히 괜찮죠. 뭐 우리나라 망하는 것도 아닌데." 했다. 거짓말을 잘 못해서 괜찮지 않으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전화라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어머니도 아들이 괜찮지 않음을 눈치채셨으리라.
모두가 잠든 밤, 맥주 캔 하나를 들고 방영이 종료된 예능 프로그램을 하나둘 돌려보았다. 웃기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긴 장면은 언제 봐도 웃겼다. 맥주 캔 하나를 금방 비웠다. 하나 더 마실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틀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성가신 졸음이 자꾸만 눈꺼풀을 눌러 내리는데 잠들기 싫었다. 졸다 말다 졸다 말다 했다. 보는 이도 없는 예능 프로그램이 혼자서 신났다. 이번에는 웃긴 장면에서 웃지 않았다. 대신 울컥했다.
'슬픔의 5단계' 중에서 '분노' 다음으로 '타협'이 와야 하는데 아마도 나는 곧장 '우울'로 와버린 듯했다. 온종일 우울했다. 소나기가 온다더니 햇살이 곰살맞게 좋다. 그래서 울컥했다. 단념하고 오늘은 그냥 우울하기로 했다. 이쯤 되니 '수용'의 단계가 언제쯤 올까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