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1일, 내 인생의 스포츠 - 탁구 편
70년대에 태어난 이들에게 '당신 세대를 대표하는 스포츠'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탁구'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아무리 찾으려 노력해도 좀처럼 보기 힘든 탁구장이 70~80년대에는 거리마다 한두 곳은 꼭 있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오라는 어머니 말씀은 한 귀로 흘리고 탁구장으로 우르르 몰려가 '우리 반 탁구 최강자'나 '우리 학교 탁구 최강자'를 가리곤 했다. 탁구장에는 언제나 교복을 입은 아이들로 북적북적거렸다. 수준 높은 플레이를 구사하는 아이가 있으면 잘 모르는 사이라도 탁구대 주위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다. 탁구를 잘 치는 아이는 모든 아이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동시에 받았다. 나는 주로 부러워하는 쪽에 속했지만 그렇다고 마음 상하지는 않았다. 탁구 경기를 관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고 배울 것도 많았다. 탁구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에게 사랑받는 최고의 스포츠였다.
탁구가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데에는 탁구의 양대 산맥, 살아 있는 전설 유남규 선수와 현정화 선수가 한몫했다. 유남규 선수는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단체전 금메달, 단식 금메달, 복식 동메달을, 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단식 금메달, 복식 동메달을 따내며 세계 최강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특히 86년 아시안 게임에서는 당시 세계 랭킹 1위 중국의 장지아량 선수를 준준결승전에서 만나 피 말리는 승부 끝에 역전승을 따냈다. 끈질긴 승부근성과 불꽃같은 투지가 빛을 발했다. 현정화 선수의 이력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단체전 금메달, 88년 서울 올림픽 복식 금메달,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 우승(남북 단일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 단식, 복식 동메달 등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였다. 탁구가 배출한 걸출한 스타플레이어들(김택수, 김기택, 안재영, 양영자 등)과 함께 탁구의 인기는 시들 줄 몰랐다. 탁구의 전성시대였다.
천년만년 사랑받는 스포츠가 어디 있을까?
언제부턴가 주위에 탁구장이 하나 둘 사라져 갔다. 탁구장이 있던 자리는 노래방이 되고 DVD방이 되었다가 다시 PC방이 되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탁구에 관심 없었다. 노래하고 게임하는 걸 더 즐겼다. 어쩌면 그들만의 자유가 허용되는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운 공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공부, 공부, 공부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장소 말이다. 탁구장의 소멸은 학교에서 '체육 시간'의 본래 기능 상실과 궤를 같이 했다. 체육 시간은 아이들이 축구를 하거나 농구를 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으레 '자율 학습' 시간이 되었다. 어른들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일주일에 두세 시간밖에 없는 체육 과목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운동을 하면 머리가 나빠져 공부를 못하게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정녕 그 시간에도 공부를 시켜야 했단 말인가! 최근 연구 성과들에 의하면 규칙적인 운동은 오히려 학습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체육의 위상은 예전과 다르지 않으니 세상사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런 측면에서 아내를 존경했다. 학부모회 활동을 하는 아내는 아이들의 건강한 정신과 신체를 위해 체육 시간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끔 고등학교 동창생들과 만나면 옛 추억에 젖어 오랜만에 그 시절로 돌아가 탁구 시합 한 번하자는 말이 나오곤 했다. 머피의 법칙인지 친구들과 만나는 장소(주로 강남이나 여의도) 근처에서는 탁구장 찾기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웠다. 찾다 찾다 포기하기 일쑤였다. 어떤 날인가에는 너무 탁구가 치고 싶어서 만사 제쳐두고 수소문한 끝에 올림픽공원 근처에 있는 탁구장까지 찾아갔더랬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도 그렇게 기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무척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허무했다. 어쩌다 탁구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탁구 프로 리그와 예능 프로그램 '올탁구나'가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스포츠가 다시 부활하기를 바란다.
어쩌다 재미 삼아 한두 번 찾는 게 아니라 본격적인 운동으로써 탁구를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 일이었다. 농구는 힘에 부치고 골프는 배울 생각이 없고 수영은 잘난 척하는 세 사람 보기 싫어서 가기 싫었다. 좋아서 하는 운동, 재미있어서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운동을 하고 싶었다.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 운동이 바로 탁구였다. 탁구도 건강한 육체와 튼튼한 체력을 요구했지만, 아직은 풋내기 수준이라 초라한 몸으로도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제대로 탁구를 시작하면서 아내가 왜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이들을 깨워 함께 수영장에 가는지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라켓을 잡을 때, 2.7g짜리 하얀 공에 온전히 집중할 때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탁구에 심취하자 탁구 실력은 생각만큼 가파르게 향상되지 않아도 가로 152cm x 세로 274cm 탁구대에서 인생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네 삶이 탁구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초심자의 행운(beginner's luck)'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초심자의 행운이란 어떤 분야에 막 입문한 초보자가 일반적인 확률 이상의 성공을 거두는 것을 일컫는다. 탁구장에 회원 등록하면 처음 라켓을 잡아본 순수한 초보자가 아닐 경우 기존 회원들이 실력 검증도 할 겸 랠리 상대가 되어 준다. 인간관계에서 첫인상이 중요하듯이 이 순간이 탁구장에서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된다. 자연스러운 랠리는 기본이고 가끔 매서운 공격이나 그럴싸한 서비스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탁구장은 무척 지루한 공간이 될 터였다. 둘 이상이 함께 해야 하는 탁구의 특성상 함께 할 상대가 없다면 상대해주는 건 차가운 머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행운의 여신에게 지독한 편애를 받은 나는 다행히 기존 '동네 탁구' 실력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초심자의 행운이 제대로 찾아왔다. 그 덕분에 강력한 스매싱과 현란한 스카이 서브를 구사하는 플레이어로 포지셔닝되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탁구장에 몰려다녔던 경험이 사라지지 않고 몸속 어딘가에 축적되어 있다고 믿었다. 초심자의 행운 덕분에 탁구 초보자에게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는 회원 등록 후 3개월을 아무 탈 없이 통과하게 되었다.
하지만 파울로 코엘료가 소설 <연금술사>에서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도전은 언제나 초심자의 행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반드시 가혹한 시험으로 끝을 맺는다."라고 말한 것처럼 초심자의 행운은 양날의 검으로 어느 날 내 심장을 겨냥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정선에서, 주식시장에서, 코인마켓에서 초심자의 지갑을 탈탈 털어버리는 악명 높은 악당처럼 탁구에서도 초심자의 행운은 독이 되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이 탁구를 찰 치는 유일한 방법은 꾸준한 훈련뿐이다. 스매싱, 드라이브, 푸시, 커트, 쇼트, 서비스 등 탁구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꾸준히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초심자의 행운이 따라주면 평소에는 꿈도 꾸지 못하는 현란한 스매싱이나 파워 드라이브를 의도와 무관하게 성공시킬 때가 많다. 그 어렵다는 백 드라이브까지 상대편 탁구대를 강타한다. 그럼 '내 실력이 이렇게 좋았었나!'라고 착각하고 자만에 빠지게 된다. 연습을 게을리하는 건 당연하고 게임이나 랠리 중에도 실패 확률이 높은 기술만 구사해 상대편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탁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초보자를 빨리 벗어나는 방법은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환상에서 되도록 빨리 깨어나 현실(연습)에 발 딛는 것뿐이다. 인생이 그렇듯이 탁구에서도 행운은 결코 연거푸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겨우 초보자를 면했지만, 탁구를 처음 접한 신규 회원과 랠리를 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해 주는 말이 있다. "배우거나 연습하지 않은 플레이가 성공했다고 기뻐하지 마세요. 그건 결국 플레이에 독이 됩니다." 당장은 이 말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머지않아 이해하게 되리라 믿는다. 결국 꾸준한 반복 이외에 탁구를 잘 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
탁구에는 '복식' 경기가 있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네 명이 동시에 경기를 치르는 방식이다. 두 사람이 한 팀을 이루게 되므로 나보다 상수(上手)인 사람과 한 팀이 되면 경기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착각하기 쉽다. 물론 이길 확률이 높아지기도 하지만 절대적이지만은 않다. 복식은 개개인의 능력보다 팀워크(호흡)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수라도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주고 장점을 극대화시켜 시너지를 발휘하는 팀이 상수팀을 상대로 승리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런 복식경기야 말로 인생의 판박이다. 탁구에서 상수와 한 팀이 되는 것이 승리의 필요조건이 아니듯 이상형도 배우자의 필요조건이 아닐 터였다. 이상형은 말 그대로 이상형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과연 우리 주위에 몇 명이나 이상형과 살고 있을까?(저요!) 이상형이 아니라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지 않은가! 특히 일부 오른손잡이 선수는 왼손잡이 선수와 팀을 꾸리는 걸 꺼려한다. 오른손잡이끼리 플레이가 익숙하기 때문이다. 익숙하다는 건 장점이자 단점이다. 서서히 끓는 냄비 속 개구리와 같다. 오래 머무르면 곧 위기가 찾아온다. 이것 역시 우리네 삶과 같다. 사실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로 구성된 팀이야말로 동선을 최소화하면서도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조합이다. 여기에 또 하나 교훈이 있다. 온전히 그 사람을 파악할 때까지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지 말 것! 그러고 보니 나도 왼손잡이 플레이어다.
2년째 계속되는 코로나로 탁구장에 가지 못한 날이 많았다. 무릎 통증, 엘보, 허리 통증으로 또 몇 주에서 몇 개월씩 쉬어야 했다. 탁구 실력이 향상될만하면 쉬고, 향상될만하면 쉬어서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래도 여건이 허락하면 빠지지 않고 탁구장에 나갔다. 지천명을 앞에 두고도 이렇게 가슴이 뛰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행복했다. 탁구장에는 어르신들이 많다. 어르신들 중에는 부부도 제법 많다. 학교 다닐 때 체육(탁구) 과목에서 A를 받았다고 자랑하던 아내를 모시고 탁구장에 간 적이 있었다. 몇십 년 만에 라켓을 잡은 사람치고는 분명히 뛰어났지만, A를 받을 정도였나 싶었다. "이 정도면 잘 치는 거지?" 질문하는 아내에게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보였다. 엄지손가락이 의미하는 바는 서로 다를지언정 두 사람 모두 만족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역시 탁구는 인생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