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4일, 미식가 아내의 맛
어느 한가한 주말 오후.
"점심에 모처럼 비빔면 먹을까?"
"안돼. 나 다이어트 중이잖아."
"아, 맞다. 나도 요즘 살찐 것 같은데 굶어야겠다."
"그래, 잘 생각했어. 배고프면 삶은 계란 먹어. 난 벌써 세 개 먹었어."
"삶은 달걀 3개? 그 정도면 한 끼 아니야?"
('습'하는 소리와 함께 아내 눈에서 레이저가 발사돼 재빨리 아이들 공부방으로 피신했다.)
10분 후.
"다 됐어. 나와."
"뭐가?"
"비빔면."
"안 먹는다며?"
"오빠(아내는 아직도 오빠라고 부른다)가 먹고 싶다며? 빨리 안 나오면 나 혼자 먹는다."
"알았어. 요것만 마무리하고 갈게."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빔면이 무려 세 그릇이나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뭐야, 둘이 먹는데 세 개나 끓였어? 넌 다이어트한다며?"
"전부 다른 거야. 지난번 장 볼 때 사 온 건데 맛이 궁금해서 하나씩 끓여봤어. 뭐가 맛있는지 먹고 얘기해 줘."
"와, 역시 먹는 데 있어서는 엄마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인정. 최고!"
"왜 이래, 나 누군지 몰라? 맛없는 음식 먹느니 차라리 굶는 걸 택하는 사람이라고."
1년 365일 다이어트하는 전문 다이어터인 아내는 미식가다. 가격을 떠나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런 아내가 요즘 푹 빠진 음식 중 하나가 비빔면이다.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는' 팔도 비빔면을 필두로 오뚜기 진 비빔면, 삼양 열무 비빔면, 풀무원 탱탱 쫄면을 거쳐 농심 배홍동 비빔면에 정착한 지 몇 달이 흘렀다. 슬슬 배홍동 비빔면도 지겨워졌는지 라면을 보관하는 찬장에 못 보던 비빔면이 늘었다. 그저 미끼를 던졌을 뿐인데 그만 아내가 미끼를 덥석 물었다. "비빔면 먹을까?"라는 말이 마치 사악한 마법사의 흑마법 주문처럼 아내의 봉인을 해제했다. 삶은 달걀 세 개로는 아무 소용없었다. 일단 먹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을 때 먹지 않으면 평소 천사 같은 아내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친절한 지킬 박사가 무자비한 하이드로 변신하는 것과 맞먹는다고나 할까? 아무튼 자신을 너무 잘 아는 아내는 무의식적으로 찬장에서 비빔면을 꺼냈을 터였다. 그것도 서로 다른 제품으로 세 봉지나.
감자 전분이 들어가 면발이 더욱 쫄깃해졌다는 삼양 비빔 밀면은 포장지 문구처럼 면발이 무척 쫄깃했다. 식감은 마음에 들었지만 매워도 너무 매웠다. 매운맛은 맛이 아니라 통증이라고 믿는 내게 너무 과했다. 매운맛으로는 배홍동 비빔면이 마지노선이었다. 혀와 입술이 얼얼해 우유를 마시거나 단무지로 안정시켜주어야 했다. 이에 반해 농심 샐러드 누들은 오리엔탈 드레싱 소스로 맛을 내 조금도 맵지 않았다. 이 제품을 비빔면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색다른 맛이 마음에 들었다. 미식가 아내도 의외의 맛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아마도 다음 정착지는 샐러드 누들이 될 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이었다. 아내는 고작 서너 번 떠먹더니 배부르다며 젓가락을 놓았다. 갑자기 다이어트 중인 게 생각났나 보다. 꼭 이런 식이다. 남은 음식은 모두 내 몫으로 돌아왔다. 아까워서였는지, 매워도 맛있어서 그랬는지 결국 세 그릇을 몽땅 비웠다. 문득 머리가 복잡해졌다.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부쩍 살이 올라오는 게 바로 이런 아내의 습관 때문일지도 몰랐다. 언제나 아내는 잔뜩 음식을 만들고 배 부르다며 가장 먼저 숟가락을 놓았다. 장미꽃에 길들여진 어린 왕자처럼 남은 음식은 아내 입맛에 길들여진 내 몫이 되었다. 어쩌면 미끼를 던진 건 내가 아니고 아내였을지도…. 아내와 나는 언제나 서로를 '다이어트의 적'이라고 으르렁거린다. 마치 저 거친 초원의 암컷 사자와 하이에나 같다. 아내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을 때는 내가 "오랜만에 치맥?"하고, 내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을 때면 아내는 소리 없이 신상 새우깡이나 아이스크림을 꺼내온다.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과연 누가 미끼를 던지고 누가 미끼를 문 것일까? 오일남 할아버지의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이러다 다 살쪄!"
그래도 우리는 올해로 결혼 20주년이 된 잉꼬부부다.
<이미지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