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 글쓰기 참 어렵다 어려워.
로저 로젠블랫이 쓴 <하버드대 까칠 교수님의 글쓰기 수업>을 읽고 한동안 글(소설)을 쓰지 못했다. 아래 대목이 문제였다.
"좋은 글쓰기는 적확하고 절제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며, 바른 자리에 바른 낱말을 놓는 것이며, 날조가 아닌 상상을 이용하는 것이며, 형용사보다는 명사, 부사보다는 동사를 선호하는 것이며, 그 밖의 사소한 많은 교훈을 따르는 것인데, 그런 것들이 물론 도움은 되겠지만 그런 것들에 정통했다고 해서 섣불리 작가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적확하고 절제된 언어를 구사하기는커녕 -데와 -대의 구별도 어려웠다. '틈틈이'가 맞는지 '틈틈히'가 맞는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어느 것이 옳은 표현인지 헷갈렸다. 마크 트웨인이 ‘거의 맞는 말과 딱 맞는 말의 차이는 반딧불과 번갯불의 차이만큼이나 크다’고 했다는데 '작다'와 '적다', '굵다'와 '두껍다'를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소설 쓰기는 주로 '한글 2020' 버전으로 하는데 가끔 내가 소설을 쓰는 것인지 한글 프로그램이 대신 써주는 것인지도 헷갈렸다. 왜 매번 내가 쓰는 문장에는 빨간 줄을 죽죽 긋는 것인지! 이 자식은 '문학적 허용'도 모르면서 하다가 이내 녀석이 추천해주는 표현으로 슬쩍 바꾸고 마는 옹졸한 나를 발견한다. 항상 다른 글을 쓴다고 생각했는데 비슷한 글로 느껴지는 게 그저 착각은 아니었다. 절반은 문학적 허용도 모르는 덜떨어진 한글 프로그램 때문이다. 나머지 절반은 기꺼이 내 탓이다.
무려 퇴고를 다섯 번이나 거친 소설을 다시 읽어 보았다. 명사보다는 형용사를, 동사보다는 부사를 선호했다. 좋은 글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도대체 누가 쓴 거야? 내가 썼다. 이런 된장. 어쩐지 글에 개성이 없더라. 문체도 없더라. 자꾸 공모전에 떨어지더라.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샌드라 거스의 <묘사의 힘>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그래 제대로 아파야 치료를 하지, 쪼금 아프면 이러다 말겠지 싶어 참는다. 상처에 또 생채기를 낸다. <묘사의 힘>의 내용은 무척 간단하다. 하지만 강력하다. 독자에게 '일일이'와 '일일히' 중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고 말한다. (어? 자기도 말하면서)
‘말하기’로는 독자의 마음에 어떤 심상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말하기’는 독자를 위해 정보를 통역해주는 일로, 독자가 스스로 이야기 속 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그 세계를 발견할 기회를 박탈한다. 반면 ‘보여주기’는 독자가 이야기 속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해답을 찾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읽기 때문에 독자는 이야기 속 세계에 사로잡힌 채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게 된다.
보여주기 방법으로 여러 가지를 설명하는데 그중 하나가 부사와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기다. 부사 대신 힘이 강한 동사를 쓰고, 형용사 대신 구체적인 명사를 사용하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이 있으면 첫 장을 고쳐보라고 제안한다. 첫 장을 고치고 고치다 아예 다시 쓰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다시 소설 쓸 용기가 나지 않는 게 당연했는지도 몰랐다. 실력은 없어도 염치는 있으니까.
다시 <하버드대 까칠 교수님의 글쓰기 수업>으로 돌아가서, 위에서 까칠한 교수님이 말한 '좋은 글쓰기'에 닿으려면 얼마나 많은 피땀눈물을 흘려야 할지 모르는 마당에 그것에 정통했다고 '작가'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란다. 우산도 아니고 오삼불고기도 아니고 오산! 예상이나 추측을 잘못한다는 뜻의 바로 그 오산이다. 이 정도면 음모론이 아닐까 합리적 의구심이 든다. 갈수록 책 읽지 않는 세상, 이미 시뻘거다 못해 피가 철철 넘치는 '레드 오션'에 풋내기들이 서성거릴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여기가 이런 곳이야!' 으름장을 놓는 게 아닐까. 공포 마케팅? 어차피 자네들은 이것도 못할 테지만, 이게 다가 아니야. 정작 중요한 건 다음부터라고 하면서 도저히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경지를 풀어낸다. 아니다, 몇몇 거장은 분명히 그곳에 닿았다. 거장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는 과잉 친절이라고!
"여러분의 글이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세상에 유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소신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변화에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향한 면밀하고 예리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글로 쓰고 있는 세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다른 누군가의 세상인 척하지 말고 말입니다. (중략) 여러분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온갖 살인과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사랑할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어떤 부조리함에 자신을 내던져야 합니다. 자기 내면의 값진 것과 고결한 모든 것을 부정하는 시대에 잘못 태어난 사람처럼 글을 써야 합니다. 모든 위대한 작가는 그 모든 시대에 그렇게 썼습니다. (중략) 사랑하세요. 믿음을 잃지 마세요. 인간의 마음은 너나없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는 그 슬픔을 대변할 수 있고, 그 짐을 덜어줄 수 있고, 그 삶을 노래하고, 노래하고, 또 노래할 수 있습니다."
뭐야, 이거 작가가 아니고 성인(聖人)이 되라는 거잖아! 음모론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쓰고 또 쓰면 좀 실력이 늘 줄 알았다. 웬걸. 고등학교 때 이 정도 노력했으면 SKY에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최선을 다했건만 어찌 된 일인지 글쓰기는 늘 제자리를 맴돈다. 안타깝게도 그 제자리가 바닥이다. 살짝 글쓰기 슬럼프가 온 것 같아 도움이 될만한 책을 읽었더니 오히려 쓸 용기를 잃었다. OMG. OTL.
<꽈배기의 맛>과 <꽈배기의 멋>을 쓴 최민석 작가는 에세이를 쓰고 싶어 소설가가 되었다는데, 나는 소설을 한 자도 쓸 수 없어 에세이에만 매달렸나 보다. 다시 소설을 쓸 수 있을까? 누가 읽어 주지도 않는 소설을.
"스스로 가장 높이 평가한 대목, 자기가 써놓고 홀딱 반해버린 대목이 종종 불필요한 대목으로 판명 날 수도 있습니다. 과감히 삭제하세요."
까칠한 교수님의 조언대로 내가 써놓고 내가 반해버린 문장을 과감히 삭제했더니 A4 100장 분량의 소설이 10장으로 압축되겠더라. 이게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늦었지만 너무 늦지 않아서.
"괜찮아. 중요한 건 방향을 잃지 않는 거니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 년의 고독' 중에서)
A4 용지를 한 장 꺼내 다음의 문장을 커다랗게 썼다. "형용사보다는 명사, 부사보다는 동사를 써라. 제발!'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천천히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