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6일, 공모전 낙선작(落選作)
외식도 맛집도 생경하던 어린 시절, 우리 남매에게 골목 모퉁이 허름한 분식집은 유일한 낙원이었다. 천 원이면 밀가루떡 여남은 개에 라면 반쪽, 당면 조금, 튀김만두 두 개, 양배추와 삶은 달걀 반쪽까지 제법 실속 있는 즉석 떡볶이와 마주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떡볶이를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군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지금은 천 원짜리 한 장으로 짭조름한 새우 과자 한 봉지 사 먹기 힘들지만, 당시 천 원의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코흘리개 남매가 천 원을 손에 쥐려면 얼마나 고군분투했던지! 마치 막 알에서 깨어나 처음 바다로 향하는 새끼 거북이처럼 목을 쭉 빼고 아버지 담배 심부름, 어머니 콩나물 심부름을 애타게 기다렸다. 심부름 값이라야 100원짜리 동전 한 개가 전부였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결국 한 달에 한 번은 분식집 낡아빠진 탁자에 나란히 앉았다. 노동과 돈의 가치를 일찌감치 깨우쳐 주려는 부모님의 큰 그림은 아니었다. 가난했다. 가난은 조금 불편했지만 일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삶의 평범한 진리를 맛보게 해 주었다. 그 맛이란 떡볶이처럼 얼얼해도 참고 견딜만했다.
길고 긴 겨울밤, 일찍 저녁밥을 먹은 날이면 잘 시간이 까마득히 멀었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동을 부렸다. 그럼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골목 어귀에서 "메밀묵 사려, 찹쌀떡."하고 구수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때다 싶어 어머니 앞으로 쪼르륵 달려가 막내아들 필살기 애교를 선보였다. 공무원 박봉으로 한 달 생활비도 빠듯한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애써 외면하셨다. 처음부터 쫄깃한 찹쌀떡은 그림의 떡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보채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나만의 떡볶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그 간청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셨다. 라면도 제대로 못 끓이던 나는 왠지 떡볶이만큼은 척척 잘 만들었다. 숱하게 많은 시간 동안 분식집에 걸터앉아 지켜봐 왔기에.
떡볶이에 꼭 필요한 떡은 언제나 집에 있었다. 길고 흰 가래떡을 비스듬히 썬 떡국 떡이었지만 상관없었다. 평소 잘 먹지도 않는 떡국 떡이 항상 집에 있어 의아했다. 나중에 알았다. 그것이 어머니의 속 깊은 배려였음을. 그것은 밥 먹고 돌아서면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자식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나만의 떡볶이 만들기는 무척 간단했다. 냄비에 물을 반쯤 채워 넣고 고추장과 설탕만으로 맛을 냈다. 연탄불 앞에서 물이 끓기만 기다리다가 뽀글뽀글 소리가 나면 얼른 떡과 당면을 함께 넣었다. 길고 거친 옛날 당면은 서너 번 구부리면 냄비에 쏙 들어가 금방 국물과 한 몸이 되었다. 어묵도 파도 넣지 않고 양념도 허술했지만, 떡볶이 맛은 환상적이었다. 길고 지루한 겨울밤을 달래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가난도 그 순간에는 나 살려라 꽁무니를 뺐다.
코로나 백신 3차 접종 후 아내가 입맛을 잃어 통 먹지 못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먹는 치킨도 제맛이 나지 않는다며 심각한 부작용을 호소했다. 입맛 없는 아내를 위해 무얼 할까 고민하는데 마침 아내가 진짜 맛있는 떡볶이가 먹고 싶단다. 그 순간 어린 시절 만들던 초간단 떡볶이가 떠올랐다. 떡볶이라면 요리 똥손인 나도 해볼 만하다 싶었다. 옛날 방식 그대로 만들려다 고심 끝에 업그레이드하기로 마음먹었다. 떡믈리에(떡볶이와 소믈리에 합성어) 학교가 있다면 수석 졸업은 따 놓은 당상인 아내에게 그 시절 레시피로는 충분하지 않을 터였다. 기본 재료 이외에 소시지, 어묵, 양배추, 양파와 파까지 준비했다. 오랜만의 실력 발휘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마법 가루(라면수프)’도 일찌감치 챙겨두었다.
겨울밤의 허기를 달래주던 초간단 떡볶이의 화려한 부활! 커다란 냄비에 물을 반쯤 부은 후 고추장과 설탕을 적당한 비율로 넣는다. 계량 따위는 사치다. 먼저 고운 빛깔이 나올 때까지 고추장을 넣고 설탕을 나중에 넣는 게 안전하다. 고추장 떡볶이는 텁텁해질 우려가 있어 설탕량 조절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묵이나 양배추, 양파에서도 단맛이 우러나기에 초반에 설탕을 많이 넣으면 매콤한 떡볶이의 매력을 잃게 되어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 과정이 지나면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벌써? 그렇다. 이제 손질된 재료를 차례차례 넣기만 하면 된다. 떡, 당면, 소시지, 어묵, 양배추 순으로 넣고 한참 끓이다 마지막에 양파와 파를 투입하고 한소끔 더 끓이면 완성이다. 물론 입맛 잃은 아내를 위한 사랑 열 스푼도 빠뜨리면 안 된다. 마법 가루는 무덤까지 가져갈 혼자만의 비밀로!
국이나 찌개를 끓일 때 아내는 으레 육수부터 낸다. 뒤포리, 멸치, 북어 대가리, 말린 홍합, 파뿌리와 무까지 재료가 어마어마하다. 꼼꼼한 계획하에 요리하는 아내가 육수도 내지 않고 계량도 하지 않은 떡볶이가 얼마나 맛있겠냐는 뚱한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아이들 표정도 엄마를 닮았다.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시식해 보라고 손짓했다. 떡 하나만 먹어도 신세계를 맛보리라 확신했다. 냉정한 둘째 아이가 먼저 용기를 냈다. 쭈뼛쭈뼛하던 첫째 아이도 포크를 들었다. 뜨거운 떡을 호호 불어가며 입에 넣은 아이들에게서 금세 탄성이 터졌다. 국물부터 맛본 아내도 놀란 토끼 눈으로 "괜찮네, 먹을만한데." 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다들 손놀림이 바빠졌다. 커다란 냄비 한가득 만든 떡볶이가 바닥을 드러내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입맛 없다던 아내 손이 제일 분주했다. 마무리로 식은 밥 한 공기와 김, 참기름을 넣고 고슬고슬하게 볶았다. 조금 전까지 "밥까지 비벼? 누가 먹는다고!" 라며 만세 부르던 아내가 가장 나중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낭만주의자들은 태초에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 사랑으로 만물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나는 사랑 옆에 소담하게 담긴 떡볶이가 있었으리라 믿는다. 어린 남매의 안식처가 되고, 길고 배고픈 겨울밤 따뜻한 위로가 되고, 입맛 잃은 아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준 존재가 바로 떡볶이였다. 누군가에게 흔하디 흔한 음식이라도 내 삶에는 더할 나위 없는 소울푸드였다. 김치볶음밥, 라면에 이어 아빠가 잘 만드는 음식이라고 아이들도 인정했다. 왠지 어깨가 으쓱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그 가난이 우리의 행복을 가로막지 못했듯, 고약한 코로나도 행복한 우리 가족 사이에 끼어들지 못했다. 코로나가 아무리 심술부려봤자 어림도 없다. 떡볶이와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한.
푸드 에세이 공모전에 낙선했다. 뭐 딱히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이라고 말은 하지만 내심 바랐다). 이전에 브런치에 써두었던 '입맛 없는 아내를 위한 궁극의 떡볶이 레시피'를 개작했다. 불성실함을 벌주려는 듯 결과는 보기 좋게 낙선. 이 정도면 오뚜기 제품 보이콧으로 소심한 나만의 저항을 해볼까 싶기도 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사회 첫발을 오뚜기로 내디딘 인연 때문에.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오뚜기는 참 괜찮은 기업이라고 생각했다. 직원들 애사심이 정말 하나 같이 투철했다. 자발적인 마음이었을 터였다. 약 두 달간 근무한 인연으로 20년 넘게 오뚜기 제품을 애용했다. 실제로 좋은 제품들이 많기도 했다. 그러니 그깟 에세이 공모전에서 똑 떨어뜨렸다고 쪼르륵 다른 회사 제품으로 갈아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가 글발이 없지 가오가 없을까! 다음 공모전에는 일필휘지로 써내려 가 참가상이라도 수상하리라 다짐하며 애꿎은 캔맥주만 꽉 움켜쥐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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