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이 책을 읽고 울지 않는다면 당신은 얼음 심장을 가졌다!
사람 마음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오래간만에 공부란 걸 해보려고 마음을 다잡았는데 마침 엄마가 “그만 놀고 공부 좀 해야지!”라고 말씀하시면 방금 한 각오가 오뉴월 땡볕에 놓아둔 아이스께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 내가 언제 공부했다고.'
연말 인센티브가 제법 쏠쏠해 송년 모임에 나가 모처럼 친구들에게 멋지게 한턱 쏘려고 마음먹었는데 한 친구 녀석이 "너 요즘 돈 잘 벌잖아. 오늘은 니가 한 번 쏴라!"라고 부추기면 열었던 지갑에 어느새 빗장을 걸어 잠근다. '오늘은 무조건 N분의 1이다!'
누구나 이런 경험 한두 번은 있을 터였다. 사람 마음은 정말 이상하다.
독자를 실컷 울리리라 작정하고 이야기 곳곳에 최루액과 신파를 한가득 버무려 놓은 소설을 만났다.
펑펑 울지도 모르니 절대 여러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읽지 말라는 광고 문구가 너무 식상해 오히려 신선했다.
작가 소개란에 '현실과 판타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밀도 높은 이야기를 선사'한다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고 가는 이야기를 쓰고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평소 울 일 없는 40대 평범한 아저씨가 과연 눈물샘을 자극하는 소설을 읽고 울게 될까?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게 무라세 다케시의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서평단을 신청했고, 운 좋게 참여하게 되었다.
책 읽기에 앞서 청개구리처럼 '울리기로 작정한 소설이니 절대 울지 않을 테야!” 제멋대로 마음먹었더랬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광고 문구대로 펑펑 울었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 애를 먹어가며 가끔 소리 내어 울었다. 방 안에서 혼자 읽어 다행이었다.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다. 대놓고 하는 거짓말이다.
누군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이라고 했다지만, 아무튼 있을 법한 이야기일 뿐, 실재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실재하는 이야기는 에세이다라고 하버드대 까칠한 교수님의 글쓰기 수업에서 읽은 것 같다)
소설에서도 핍진성(이야기에 대해 신뢰할 만하고 개연성 있다고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정도)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소설이 꼭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라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닿을 수 없는 희망, 바랄 수 없는 꿈을 이야기하기에 더욱 끌리게 되기도 한다.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이 바로 그런 이야기이다.
열차 탈선 사고로 약혼자를, 아버지를, 짝사랑하는 누나를, 그리고 아빠 같은 남편을 잃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삶이 그 순간에 딱 멈춰 더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상실에 빠진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이를 딱 한 번 만날 기회가 생긴다. 왜 그런 기회게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겨진 이들은 떠나간 이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결코 비장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일상에서 나누는 소소한 대화일 뿐이다. 그 동인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뤄왔던 고백도 있고, 생일날 먹고 싶은 카레를 만들어주겠다는 지극히 평범한 약속도 있다. 결국 마지막 기회(대화)를 통해 남겨진 이들은 다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건 어제와는 다른 한 걸음이다.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면서 놀라운 반전이 드러나고, 바로 이 부분에서 울지 않으리라는 청개구리 맹세가 봄눈 녹듯이 사라졌다. 출판사에서 서평단에 내준 숙제는 이미 끝냈다. 그런데도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이유는 하나다. 소설의 내용과 상관없이 한바탕 울고 나니 가슴이 후련했다. 어려운 프로젝트를 끝내고 난 후의 후련함, 소설을 쓰고 난 후의 후련함과는 또 다른 카타르시스였다. '요새 울 일이 없다'라고 감정의 가뭄을 겪고 있다면, '자신 있으면 나 한 번 울려 봐' 하고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능력이 있다면 이 소설에 도전해 보기를 바란다. 그렇다. 이것은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이들을 향한 '눈물 참기 챌린지'다. 나는 보기 좋게 깨졌다. 여러분은 도전에 응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서점으로, 도서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