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판타지 에세이
늦은 밤, 딸깍 하고 방금 딴 캔 맥주 하나를 곁에 두고 TV를 켰다. 늦은 시간이라 영화 채널을 틀어 놓았지만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TV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방금 단편소설을 탈고한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랄까. 글을 쓰면서 후속작이라고 해야 할까 프리퀼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이런저런 아이디어도 샘솟았다. 모처럼 창작의 영감이 온몸을 휘감는 기분 좋은 밤이었다. 알싸한 맥주 맛이 유난히 달큰했다.
얼추 맥주를 비워갈 무렵, 어둠 속 유일한 광원인 텔레비전 화면으로 미지의 생명체가 날아와 앉았다. 그리고는 그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쟤가 정말 날 수 있는 거였어?" 새로 지은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이미 오래전 헌 집이 되었지만 '한 깔끔'하는 아내 덕분에 항상 새집처럼 깨끗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녀석'과 마주친 적이 없었다. 아니, '녀석'은 우리 집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녀석은 나의 당황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힘차게 비상해 방안을 마음껏 비행했다. 그러다 하필 잠들어 있는 아내 머리 바로 위 천장에 착륙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잠든 아내를 애타게 불러 깨웠다. "주인님, 일어나 보세요. 녀석이 지금 주인님 머리 위에 있어요!" 대범한 아내는 눈도 뜨지 않고, "빨리 TV 끄고 자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우리 집에 녀석이 나올 리가 없잖아." 하는 것이 아닌가! '무슨 소리야, 지금 바로 당신 머리 위에 있는데!' 머릿속으로만 되뇌고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했다. 이 시간에 잠든 사자를 깨워 신상에 이로울 게 얻다는 본능이 이성을 멈춰 세웠다. 마침 눈에 띈 L자 파일을 돌돌 말아 손에 쥐었다. 하필 종이가 몇 장 들어있지 않아 얇아도 너무 얇았다. 이걸로 녀석을 타격할 수 있을까? 그랬다가 실패하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지? 아내 말고는 무서울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좀 있긴 하다, 녀석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졌다. 그사이 녀석은 지혜롭다고 떠벌리는 연악한 種을 한바탕 비웃고는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처음부터 이곳에 없었던 존재인 양 흔적도 없이. 순간, 번뜩하고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이것은 상징이다! 녀석은 방금 마무리한 단편소설의 주인공이었다. 녀석의 힘찬 비상은 이야기 속의 중요한(클라이맥스) 장면이었다. 내 소설 속 주인공이 나에게 찾아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음이 틀림없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그러나 이내 정신 차리고 합리적 이상주의자로 돌아왔다. 그럴 리 없었다. 무슨 환상특급이나 기묘한 이야기도 아니고! 방금 일어난 일이 모두 꿈이었던가! 정말 꿈이라도 꾼 걸까? 아내의 책망을 무릅쓰고 얼른 불을 켰다. 아니나 다를까 날카로운 비난의 화살이 귓가에 날아와 꽂혔다. 재빨리 불을 껐다. 이제 와서 녀석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다. 그렇다. 녀석은 수억 년 동안 어둠 속에서만 존재하며 불빛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지는 숨바꼭질 명수니까. 남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달큼함은 온 데 간 데 없고 텁텁한 미련만이 입안에 가득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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