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 부부 사이 운전교육만큼 위험한 아이와의 영어 공부
일요일 저녁, 모처럼 제대로 된 글을 써보리라 마음먹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최근에 읽은 책(최재천의 공부,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스립')에 관해 쓸까, 8월로 예정된 '다누리호'의 달 탐사 계획에 관해 쓸까 이런저런 고민하는데 아내가 긴급 출동 명령을 내렸다. "글 써야 하는데…" 장맛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개미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지르는 비명보다 조금 더 작게 안 하고 싶은 감정을 담아 속삭였다. 잠시 동안 천둥소리처럼 무거운 침묵이 주방과 공부방 사이에 내려앉았다. 아내는 귀도 참 밝다. "빨리 안 튀어오냐!" 과거 시험 보러 갔던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변학도 생일잔치에 들이닥칠 때도 이렇게 박력 넘치지는 않았을 터였다. 모니터에 브런치 하얀 화면을 띄워 한 글자도 타이핑하지 못하고 아내 앞으로 쪼르륵 달려갔다. 둘째 아이 영어 숙제를 도와주라는 긴급 미션이 떨어졌다. "와우, Mission Impossible!"
둘째 아이는 아빠와 영어 공부하는 걸 무척 싫어한다. 나라도 나와 영어 공부하는 게 썩 좋지만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시작은 언제나 사귄 지 100일도 안된 연인 같다. 달콤하고 정겨운 말투, 나긋나긋한 히메나 선생님이 따로 없다. 하지만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최대 30분이다. 30분 이후부터는 공포와 절망의 화신으로 변한다. "아, 이래서 부모들이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구나." 절실히 깨닫는 순간이다. "단어 좀 외워라, please!"라는 말을 수천 번은 되뇌게 된다.
여기 'gather'라는 단어가 있다. '모이다', '수집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다. 이 단어를 가지고 아이와 둘이 나눈 대화를 살짝 공개해 본다.
"gather"라는 단어 뜻 알지? 천 번도 넘게 했잖아."
"글쎄, 기억 안 나는데? 힌트 좀."
"힌트는 무슨 힌트? 단어를 안 외우니까 그렇지. 단어 좀 외우라고!"
"알았으니까 힌트 좀 주세요."
"together라는 단어 알잖아?"
"아, 아이스크림! 함께라는 뜻이잖아."
"맞아, 그럼 gather라는 뜻은 뭘까?"
"아, 맞다. 함! 아니 께인가?"
뭐 이런 식이다. 히메나 선생님으로 계속 버틸 수 없는 이유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이런 적도 있었다.
"아들, fresh라는 단어 뜻 알지?"
"글쎄, 기억 안 나는데? 힌트 좀."
"뭐가 기억 안 나! 어제도 했는데!" (이때는 자주 영어를 봐줄 때였다)
"알았으니까 힌트 좀 주세요."
"좋아. fresh milk."
"fresh milk라고? 아, 매일?"
당시에 우리 집에서는 매일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는 fresh를 매일이라고….
내가 둘째 아이만 할 때는 아는 영어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영어라는 과목을 공부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얼마나 충격받았던지 모른다. 솔직히 그런 나에 비하면 둘째 아이 영어는 거의 네이티브 수준이다. 제법 두꺼운 영어책도 척척 읽고 해석도 곧잘 한다. 특히 발음은 우리 가족 중에 가장 좋다. 얼마나 야무지게 r 발음을 하는지 정통 뉴요커도 부러워할 정도다. 그래서 조기 교육이 중요한가 보다 싶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잘하면서 가끔 이렇게 아빠가 뒷목 잡고 쓰러지게 만든다.
<최재천의 공부>는 '어떻게 배우며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안희경 칼럼니스트와 최재천 교수가 묻고 답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밑줄 치며 읽었고, 나중에 한 번 더 읽고 싶은 책이기도 한데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나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한 대목이 자꾸만 뇌리에 되새겨졌다. "아이를 가르쳐서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세상을 보고 습득하도록 어른이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중학교 때 다른 과목은 모두 성적이 좋지 않은데 유독 영어만 잘하는 친구가 있었다. 없는 용돈을 쪼개 떡볶이를 사주며 비결을 추궁하니 딱히 노력하는 것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다. 그 친구가 팝송을 무지 좋아한다는 사실을. 좋아하는 팝송의 가사를 따라 적고, 해석하고, 다시 따라 부르며 자연스럽게 영어와 친해졌던 것이다. 당시 나는 홍콩 영화와 홍콩 노래에 빠져 있었지만 중국어는 한 마디도 못했는데 말이다.
둘째 아이는 게임을 무척 좋아한다. 그 좋아하는 밥도 건너뛸 정도다. 한 번은 영어 공부하는 걸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게임할 때 영어 나오면 아빠나 형아한테 물어보지 말고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이의 두 눈이 모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분명 그때 아이의 영어 실력은 한 단계 상승했을 터였다. 다시는 게임하면서 아빠에게 영어 단어 뜻을 물어보지 않았다. 스스로 세상을 보고 습득하도록 하는 것,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이 교욱이고 부모의 몫인데, 그걸 잘 아는데, 참 쉽지가 않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