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44년 7월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오엔은 비로소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번에는 그녀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 모두가 동시에 알아챘다. 잿빛 하늘이 막 붉게 물들어 갈 무렵, 대지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돌풍이 대기를 찢는 소음과 함께 순식간에 마을을 덮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맹수처럼 사납고 거칠었다. 오엔이 예상하지 못한 급작스러운 날씨 변화였다. 이제껏 마을 주민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이상한 돌풍이었다. 화성 날씨가 아무리 변덕스럽다고 해도 이 정도로 예측 불가능하진 않았다. 사실 오엔은 미세한 공기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날씨 변화를 예측했다. 바람이 얼마나 세차게 불어올지 바람이 일러준 셈이다. 사나운 폭풍이 휘몰아치리라는 것도 대기의 떨림으로 감지했다. 바람 끝에서 팽팽해진 공기를 느끼면 어김없이 폭풍이 몰려왔다. 이번에는 분명히 달랐다. 날씨가 변하리라는 조짐은 먼지만큼도 없었다. 심지어 한낮의 부드러운 대기는 푹신한 이끼 같았다. 오엔은 날씨를 예측하는 능력이 사라진 게 아닐까 불안했다. 외톨이일 때가 좋았다고 불평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자신의 문제나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마을이 예상하지 못한 돌풍에 휩싸였으니 온전할 리 없었다. 아직 보수 작업도 끝내지 못한 도로며 집들이 마저 무너져 마을 전체가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마을의 상징이자 무엇보다 튼튼하게 쌓아 올린 개척자의 탑마저 허물어졌다. 마을 주민 여럿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당한 아이들도 셀 수 없었다. 돌풍으로 쑥대밭이 된 마을 여기저기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말을 잃은 주민들에게서 명랑함이나 생기는 찾을 수 없었다. 온몸에 모래 먼지를 뒤집어쓴 오엔은 마을 주민들의 눈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분노를 발견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날씨를 예측하는 게 그녀가 공동체를 위해 맡은 임무였으니까. 뜻밖에 불행을 겪게 되면 누구나 원망할 대상을 찾기 마련이다. 오엔은 자신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주민들 마음이 누그러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당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건 다른 이유였다. 촌장 할아버지와 탐험대가 걱정되었다. 튼튼한 마을을 이 정도로 만든 돌풍이라면 탐험대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었다. 오엔은 마지막 남은 가족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 날씨를 예측하는 능력마저 사라져 버렸을지 모르는 지금 그들을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발을 동동거리는 것뿐이었다.
오엔이 무기력감에 빠져 방황하는 사이 누리가 소리 없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에게서 원망이나 분노는 발견할 수 없었지만 수줍은 미소 또한 사라지고 없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먹함을 참지 못하는 오엔이 먼저 정적을 깼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속 시원히 해."
“그게, 이번 돌풍은 오엔도 예측할 수 없었던 거지? 응? 고약한 화성 날씨를 어떻게 매번 정확히 알겠어. 그지, 맞지?”
아침에 만날 때만 해도 제법 어른답게 굴던 그가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녀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만 늘어놓았다.
“네가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어떤 말을 듣고 싶어?”
“진실을 알고 싶어.”
“이미 벌어진 일이야. 진실이 무슨 의미가 있어?”
“마을 주민들이 널 보는 눈빛을 봤어. 오엔이 모든 걸 책임질 필요는 없어.”
“날씨를 예측하는 게 내 일이야. 이유가 무엇이든 실패했고. 주민들이 화풀이할 대상을 찾는다면 그건 내가 되어야만 해.”
“그건 내가 싫어. 왜 자꾸 너 자신을 고독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거야. 이제 겨우 주민들도 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는데.”
별은 밤하늘에만 빛난다고 생각했는데 오엔은 지금 누리의 눈 속에서 수많은 별들을 보았다. 별 보기를 좋아하는 그녀도 그의 눈 속에 담긴 아름다운 별들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누리야, 난 처음부터 외톨이였어. 너도 알잖아. 그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아니야, 고작 외톨이 따위가 네 운명이 아니라고. 진짜 운명은 이거야. 자, 받아. 할아버지가 네게 전해주라고 했던 물건이야.”
오엔은 누리가 내민 물건을 엉겁결에 받아 쥐었다. 한가운데 달린 작고 투명한 결정체가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목걸이였다. 처음 보는 신기한 물체였다. 촌장 할아버지가 이 목걸이를 왜 자신에게 전해주라고 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이 허공을 헤맸다.
“할아버지가 금단의 땅 끝에 닿았다는 걸 마을 주민 전부가 믿은 건 아니었어. 가끔 할아버지조차 확신하지 못했지. 사랑하는 자식들을 잃고 오랫동안 평원을 헤맸으니 제정신인 게 더 이상했을 거야. 모든 걸 포기하려던 순간 이걸 발견하셨데. 할아버지는 이걸 돌소금이라고 불렀어. 할아버지가 아주 어릴 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에게서 전해 들었다고 하셨어. 검은 땅과 맞닿은 붉은 바다에는 이런 돌소금이 무척 많다고.”
달빛에 목걸이를 비춰 보던 오엔의 눈이 돌소금보다 환하게 빛났다. 검은 땅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촌장 할아버지는 왜 지금까지 숨겨 왔을까? 아니 왜 하필 지금 돌소금이 자신에게 온 걸까? 머릿속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로 가득했다. 누리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질문들 사이를 헤집고 그녀에게 닿았다.
“만약, 만약에 말이야 할아버지가 잘못돼 돌아오지 못하면 검은 땅을 찾는 일은 오엔에게 맡기라고 하셨어. 네가 가진 능력이라면 돌소금 냄새를 좇아 검은 땅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오엔의 커다란 두 눈이 손톱 달처럼 가늘어졌다. 마을을 폐허로 만든 장본인이 위대한 탐험가들조차 성공하지 못한 일을 해낼 턱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날씨를 예측하는 능력마저 잃어버렸을지 몰랐다.
“내가 그런 엄청난 일을 어떻게 해?”
“할아버지가 늘 내게 말씀하셨어. 누군가 검은 땅에 닿는다면 그건 바로 오엔 네가 될 거라고.”
“그 어려운 일을 나 혼자? 절대 못해.”
누리가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섰다. 소꿉친구도 짝사랑의 열병을 앓는 이도 아닌 마을의 책임자로서 그녀 앞에 섰다.
“오엔, 아무도 너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아. 네 운명은 네가 결정하는 거니까. 난 온종일 생각했어. 왜 할아버지가 철부지 같은 내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셨는지를. 할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기로 마음먹은 거야. 이번 탐험대마저 실패하면 마을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을 테니까 모든 걸 걸 수밖에 없으셨지. 그래서 할아버지를 막아서지 못했던 거야. 할아버지의 결심을 눈치챘으니까. 그런 할아버지가 네게 이 목걸이를 전해주라고 하셨어. 할아버지는 오엔을 믿으니까. 나도 그렇고." 난 내 길을 갈게, 넌 너의 길을 가."
오엔은 손에 쥔 목걸이를 목에 걸쳤다. 누리의 말이 옳았다. 폐허가 된 마을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작은 돌멩이 몇 개 옮기는 게 전부였다. 그녀가 가진 능력이라면 검은 땅까지는 몰라도 먼저 출발한 탐험대는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터였다. 촌장 할아버지와 함께라면 검은 땅을 찾는 일도 시도해볼 만한 모험이었다. 발만 동동거리며 걱정하느니 한시바삐 출발해 탐험대에 합류하는 게 현명했다.
"좋아. 떠날게. 그렇지 않아도 돌풍 때문에 촌장 할아버지가 걱정 됐거든."
"고마워, 오엔. 여기, 식량을 좀 준비했어. 내가 아는 넌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믿었거든. 저기, 오엔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무슨 부탁?"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나가야 해. 분명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 기다리고 있을게.”
누리가 건넨 식량 꾸러미를 등에 메던 오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숨기고 싶어도 달빛이 너무 환해서 그럴 수 없었다. 괜히 어색한 분위기를 만드는 녀석에게 한바탕 가시 돋친 말을 퍼부으려고 했지만, 정작 그녀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나왔다. 까칠한 그녀의 진짜 속마음이었다.
“만약 내가 검은 땅을 찾지 못하거나 영영 돌아오지 못하면?”
“그땐 내가 널 찾으러 갈게. 네가 어디에 있든 알 수 있으니까. 그게 내 운명이거든."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아무도 먼저 용기 내 정적을 깨지 않았다. 오엔과 누리는 환한 달빛 아래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마주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오엔이 딱딱한 돌멩이 같은 심장을 가졌다고 해도 누리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리는 오엔을 이성으로 대했다. 마주 보고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말보다 웃음이 곱절은 많았다. 오엔이 어디에 있든지 그의 시선은 언제나 그녀를 향했다. 그 마음을 알기에 오엔은 누리에게 더 까칠하게 굴었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소꿉친구와 어색한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둘은 끝내 안녕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뒤돌아 섰다. 오엔은 달빛을 따라 힘차게 달렸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누리도 울지 않을 테니까. 오엔은 돌소금 냄새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생경한 냄새가 온몸에 퍼져 아찔했다. 이런 게 붉은 바다 내음일까? 오엔은 다시 한번 돌소금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평소에도 날랜 오엔의 몸이 유난히 가벼웠다. 얼마나 가볍던지 마치 자신이 하늘을 날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모두가 깊이 잠든 밤, 환한 달빛 아래서 오엔은 자신의 운명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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