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은 언제나처럼 떠들썩하고 활기 넘쳤다. 오엔이 폭풍이 오리라는 걸 미리 알려준 덕분에 다행히 이번에도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그래도 오래된 집들이며 도로, 마을 광장과 아이들 학교 일부는 지독한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일찍이 현실에 순응하는 방법을 온몸으로 터득한 마을 주민들은 어차피 낡은 건물들은 손봐야 했다며 다 함께 허물어진 도로와 학교를 정비하느라 분주했다. 주민들은 단결된 힘이야말로 척박한 환경에서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비결이라며 한 목소리로 노래했다. 아침 햇살이 제법 따가웠지만 아무도 게으름 피우지 않았다. 어린아이 몇몇이 오엔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꼬물꼬물 앳된 모습이 귀여웠다. 오엔에게 질문을 퍼붓기 전까지는. 어떻게 날씨를 미리 알 수 있는지 별빛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질문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지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물론 오엔도 처음에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바람이 말해주었다고.' 하지만 늘 그렇듯이 아이들의 질문은 결코 멈출 줄 몰랐다. '바람이 뭐라고 말해주었는지, 자신들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그녀는 이런 상황이 몸에 잘 맞지 않는 바이오 슈트처럼 불편했다. 이쯤 되면 외톨이로 지내던 시절이 그립기까지 했다. 오엔은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뒤꽁무니를 졸졸 따르는 아이들에게 서둘러 인사하고 특유의 날랜 동작으로 마을 한가운데 있는 ‘개척자의 탑’으로 향했다. 꾸물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현명한 촌장 할아버지는 오엔의 꿈에 대해 무언가 말해줄 게 있을 터였다. 촌장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가장 경험이 많았고 누구보다 지혜로웠다. 오엔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촌장으로서 마을을 위해 헌신했다. 마을 주민 모두에게 공평했으며 어려운 일이 닥치면 가장 먼저 앞장섰다. 마을 주민들이 오엔을 놀려댈 때도 촌장 할아버지의 지혜가 빛을 발했다. 촌장 할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오엔 편을 들었다면 아마도 마을 주민들이 더 그녀를 따돌렸을지도 몰랐다. 촌장 할아버지는 공동체의 안녕과 지속을 위해서는 오늘을 열심히 사는 이들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내일을 꿈꾸는 이들도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법이라고 주민들을 타일렀다. 일찍 부모를 잃은 오엔에게 촌장 할아버지는 친가족이나 다름없었다.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개척자의 탑으로 향하는 길에 멀찍이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누리. 몸집이 커져 이제는 어른 티가 제법 났다. 마을 주민 몇몇과 무너진 창고를 손보는 중이었다. 오엔은 실없는 농담이나 떠벌리는 녀석과 머릿속이 복잡한 지금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재빨리 샛길로 피해 가려는데 그만 녀석과 덜컥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또 시달릴 걸 생각하니 땅이 꺼질 듯 한숨부터 나왔다.
“안녕, 오엔. 며칠 사이 더 예뻐졌네.”
어느새 눈앞까지 달려온 누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도 무척 어른스러웠다. 예쁘다는 말에 오엔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또 싱거운 이야기 한다. 제발 부탁인데 나한테 신경 좀 꺼 줘. 누리, 너 아니어도 머리가 복잡하니까.”
“미안. 오엔 덕분에 마을이 무사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다친 주민들도 없고."
누리의 사과에 오엔의 뾰족한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가시 돋친 말도 어느새 뭉뚝해졌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마을을 위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그런데 어딜 그렇게 서둘러 가? 혹시 할아버지 만나려고?”
“응. 촌장 할아버지 개척자의 탑에 계시지?”
“아니. 소식 못 들었어? 할아버지 아침 일찍 탐험대와 함께 떠나셨어. 마을 주민들이 나서서 말렸지만 소용없었어. 그나마 ‘검은 땅’ 근처까지 다녀온 건 할아버지뿐이니 그 똥고집을 누가 말려. 이번 폭풍이 끝나면 한동안 날씨가 맑으리라고 오엔도 말해주었으니 지금 떠나지 않으면 소중한 경험이 고스란히 잊힌다나? 어찌나 고집을 부리시던지 끝내 나도 포기하고 말았어.”
오엔의 작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탐험대가 곧 떠나리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촌장 할아버지가 탐험대에 합류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는 데는 촌장 할아버지의 지혜가 필요했다.
"마을 일은 어떻게 하고?"
"그건 당분간 내게 맡기셨어. 나 같은 덤벙이가 뭘 할 수 있다고 할아버지도 참…."
"누리, 너라면 잘 해낼 거야. 그렇다고 촌장 할아버지가 탐험대와 함께 떠나시다니. '금단의 땅'을 어떻게 지나가시려고!”
오엔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 누리의 가슴 안에 콕 들어와 박혔다. 언제나 자신에게 까칠하게 구는 그녀였지만 역시나 참모습을 알아봐 주었다. 누리의 넓은 가슴이 자꾸만 몽글해졌다.
“날씨만 허락한다면. 할아버지는 강한 분이니까. 그나저나 오늘 밤에 시간 있어?”
“없어! 내가 밤에 누구 만나는 거 봤어?”
금방 까칠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누리는 상처받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진심을 알았으니까.
“맞다. 오엔은 별들이랑 이야기하느라 바쁘지. 그래도 잠깐 시간 내야 할 거야. 할아버지가 오엔에게 전해주라고 맡긴 물건이 있거든.”
“정말? 그게 뭔데?”
이번에는 오엔이 예고도 없이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둘 사이가 얼마나 가깝던지 하마터면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짧은 순간, 오엔에게서 아침 이슬을 머금은 이끼 냄새가 풍겼다. 누리는 그 향기에 실컷 취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마을 복구가 먼저였다.
“궁금하면 시간 내. 할아버지가 꼭 전해주라고 당부하셨어. 싫으면 말고.”
“알았어. 알았다고! 회색 달이 가장 밝게 빛날 때 개척자의 탑 앞으로 갈게. 거기서 만나.”
"좋아.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오엔과 헤어진 누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 창고로 달려갔다. 오엔은 한참 동안 누리와 마을 주민들이 창고를 보수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코흘리개 어린아이였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듬직해 보였다.
오엔은 마을을 복구하느라 바쁜 주민들 사이를 마치 방랑객처럼 배회했다. 왠지 어디에도 스며들지 못할 것 같았다. 마을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주민들의 경제 활동은 전적으로 수렵 채집에 의존했다. 일정 지역에 머물다 더 이상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하면 다음 정착지를 찾아 이동했다. 지금 마을 주변은 먹을거리가 풍부해 다른 정착지보다 몇 배는 오래 머물렀다. 촌장 할아버지나 마을 원로들도 이토록 풍족한 시대는 난생처음이라고 한데 입을 모을 정도였다. 하지만 영원한 풍요로움이란 없었다. 생존을 위해서 땅을 파헤치고 주변의 식량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마을이 들어섰던 자리는 흙먼지만 풀풀 날리는 거칠고 메마른 땅으로 변했다. 시간 차이만 있을 뿐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죽음의 땅이라 불리는 넓은 모래사막도 오래전에는 자신들의 조상이 정착했던 마을이었는지도 모른다. 더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하기 전에 주민 모두가 옮겨갈 수 있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는 게 탐험대가 맡은 임무였다. 식량 자원이 풍부하고 살기 좋은 시절이라는 건 수많은 새 생명이 태어난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근래 들어 어린아이가 부쩍 늘어났으니 서둘러 탐험대를 꾸린 일과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목숨을 위협할 만큼 험난했다. 죽음의 땅을 경계로 가까운 거리에는 새로운 마을이 들어설만한 장소가 남아있지 않았다. 한번 마을이 들어선 지역은 극도로 황폐해졌기에 탐험대는 점점 멀리까지 조사 활동을 떠났다. 화성의 광활한 대지는 미지의 세계 그 자체였다.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지구의 후예들에게 언제나 큰 위험이 뒤따랐다. 목숨을 잃는 끔찍한 일들도 빈번했다. 오엔과 누리의 부모들도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났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이 목숨 걸고 찾아 헤매던 지역은 전설의 ‘검은 땅’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검은 땅은 '금단의 땅'을 가로질러야 닿을 수 있었다. 금단의 땅은 끝없이 펼쳐진 평원이었다. 얼마나 넓은지, 무엇이 사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먹을거리는커녕 단단한 바이오 슈트를 뚫는 강한 햇빛 때문에 아무도 그 지역을 살아서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탐험대가 목숨을 건 모험을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검은 땅이 거대한 식량 지대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애써 땅을 파헤칠 것도 없이 눈 닿는 곳이 모두 먹을거리라고 했다. 이 모든 게 검은 땅이 붉은 바다와 맞닿아 있기에 가능했다. 마르지 않는 붉은 바다가 존재하는 한 검은 땅은 영원하리라는 전설이 탐험대를 유혹했다. 정말 검은 땅이 존재한다면 더 이상 정착지를 찾아 목숨을 담보로 모험할 필요가 없었다. 영원한 정착이야말로 마을 주민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탐험대가 꾸려졌지만, 검은 땅을 찾아 떠난 탐험대는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유일한 생존자가 바로 촌장 할아버지였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할아버지는 금단의 땅 어딘가를 헤맬 때 검은 지평선을 똑똑히 보았다고 했다. 그곳에 닿을 수는 없었지만, 검은 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마을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다. 오엔도 촌장 할아버지가 돌아오던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누구보다 건장한 몸을 자랑하던 할아버지가 반쪽이 되어 돌아왔다.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기적이라고 마을 주민들이 입을 모았다. 촌장 할아버지가 건강을 되찾는 동안 다른 탐험대가 현재 마을이 들어선 지역을 발견했고, 그 이후로 검은 땅을 찾아 나설 탐험대는 꾸려지지 않았다. 탐험대가 다시 검은 땅을 찾아 떠났다는 건 현재의 마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촌장 할아버지까지 직접 나섰으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엔은 촌장 할아버지와 탐험대가 걱정되었다. 그래서일까, 이유도 없이 자꾸만 쿵쾅거리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