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별의 전설. Chapter 5

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44년 7월

by 조이홍

Chapter 5. 진실


오늘도 더 뜨거우라는 임무를 훌륭하게 끝마친 태양이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수평선 끝에 내려앉았다. 잿빛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자 회색 대지에도 낮게 어둠이 깔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낮과 밤의 경계는 무(無)의 세계를 심오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웠다. 그 아름다움 한가운데서 비극이 일어났다. 전성기 시절 못지않게 건장했던 몸집이 거의 반쪽으로 줄어든 할아버지가 바닥에 웅크린 채 무언가를 입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었다. 무척 낯익은 생김새였다. 그건 바로 머리였다. 바닥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패한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언제나 훌륭한 지도자이자 다정한 이웃이었던 촌장 할아버지가 먹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탐험대원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마을의 미래를 함께 고민했을 마을 주민이었다.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던 촌장 할아버지의 두 눈이 지독한 몽유병에라도 걸린 듯 허공에서 길을 잃었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설명을 요구하는 오엔이 시선을 맞추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할아버지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오엔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현실로 소환된 건 그녀였다.

“촌장 할아버지, 촌장 할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저예요. 오엔이요.”

여전히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는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촌장 할아버지는 남은 시체마저 먹어치우려는 듯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한 마리 맹수 같았다. 끔찍한 장면을 참지 못한 그녀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서러운 눈물이 회색 대지 위로 떨어졌다. 할아버지의 지혜마저 삼켜버린 금단의 땅이 원망스러웠다. 유한의 굴레에 갇힌 자신들의 신세도 한탄스러웠다. 지독한 운명을 벗어나려면 누군가 금단의 땅을 가로질러 검은 땅에 닿아야 했다. 지금은 오엔의 그 운명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촌장 할아버지를 소리 없이 안아주었다. 앙상한 그의 몸이 두 팔에 닿자 눈물이 더 거세게 흘렀다.

"할아버지 제발 정신 차리세요. 할아버지 없이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요."

그때였다. 허공에서 길을 잃은 그의 시선이 마침내 목적지를 찾았다. 그곳에 별을 좋아하는 소녀가 있었다.

“오, 오엔. 이곳까지 무사히 왔구나. 너라면 해낼 줄 알았어. 해낼 줄 알았다고.”

"절 알아보시겠어요, 할아버지? 맞아요, 저 오엔이예요. 할아버지 냄새를 따라 이곳까지 올 수 있었어요. 그런데 탐험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할아버지가 지금 뭘 하시는지…."

흐린 어둠 속에서 촌장 할아버지의 두 눈이 별처럼 빛났다. 지혜로운 지도자로 돌아왔다는 신호였다.

“얘야, 궁금한 게 많을 줄 안다. 하지만 내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단다. 지금부터 이 할아비가 하는 말 잘 들어라. 그리고 할아비가 무엇을 부탁하든 꼭 그리하겠다고 약속해다오.

“네? 무슨 말씀인데요?”

“어쩌면 아주 불편한 진실이란다. 네 운명이기도 하고. 어서 약속해다오.”

“네, 약속할게요,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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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짙은 어둠이 회색 대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창백한 회색 달이 태양이 사라진 하늘에서 주인 행세를 했다. 별들이 때로는 무리를 지어, 때로는 하나하나 차례대로 불을 밝혔다. 화성의 밤은 낮보다 아름다웠다. 촌장 할아버지의 차분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 낮게 깔렸다. 오엔은 목소리에 숨겨진 미세한 떨림을 금방 눈치챘지만 아는 척하지 않았다.

“마지막 금단의 땅 탐험에서 이 할아비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강하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란다. 다른 탐험대원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그날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아직도 생생하구나. 한 무리의 용감한 탐험대가 마을을 떠났지만 사고가 끊이지 않았지. 변덕스러운 화성의 날씨가 언제나 문제였지. 거대한 폭풍이 덮쳐 나흘 동안 꼼짝달싹 못하는가 하면 갑작스레 찾아온 돌풍이 지형을 변화시켜 수시로 길을 잃었단다. 단단한 피부를 태워버릴 듯한 태양풍도 우리를 괴롭혔지. 그때마다 동료들을 하나둘 잃었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단다. 천신만고 끝에 금단의 땅에 닿았지만 공교롭게도 나와 내 아들, 그리고 네 아버지와 어머니만 남게 되었단다. 우리는 그런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단다. 그래서 결심했지. 끝까지 가 보기로. 그리고 약속했단다. 먼저 죽으면 살아남은 이의 양식이 되어 주기로 말이야. 우리는 결코 동족을 먹지 않았지만, 이 별에 도착한 최초의 선조들은 이 방법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았단다. 할아비가 아주 어렸을 때 할아비의 할아버지에게서 전해 들었지. 생명 하나가 꺼질 때마다 우리는 더 나아갈 수 있었단다. 연장자인 내가 먼저 죽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자식들을 먼저 보냈지만 울 수도 없었단다. 우는 힘마저 아껴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야 했거든. 신념을 따르기로 한 이상 계속 나아가야 했지.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날을 달리고 또 달렸지. 운명의 장난인지 마지막 순간에는 할아비와 네 엄마 단둘만 남게 되었단다. 네 엄마도 어릴 때부터 할아비를 무척 따랐단다. 너처럼 말이야. 마지막 눈 감는 순간까지 네 엄마는 온통 네 걱정뿐이었지. 별종이라 놀림받던 네가 마을 주민들과 어울릴 수 있을지 말이야. 네 엄마가 숨을 거두자 나는 멈출 수밖에 없었단다. 어린 누리와 네가 눈에 밟혀 더는 나갈 수 없었지. 탐험은 실패하더라도 어린 너희들을 포기할 수 없었단다. 그때 태양에 반짝이는 투명한 돌이 눈에 띄었어. 믿을 수 없었지만 정말 그곳에 있었지.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단다. 돌소금은 검은 땅의 전설이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지. 먼저 떠나간 동료들의 희생이 빚은 행운이었지. 할아비는 그곳에서 멈췄지만, 다음 세대, 혹은 그다음 세대가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디딤돌이 되어 주리라 마음먹었단다. 얘야, 할아비는 네가 자라는 모습을 곁에서 쭉 지켜봤단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놀림감이 되기도 했지만 네가 가진 재능은 최초의 선조들을 닮았어. 넌 정말 특별하단다. 나는 더 나아가지도 못하면서 포기할 수 없었어. 오엔, 너를 이곳으로 이끌기 위해, 그리고 네게 이 말을 전하기 위해. 부디 이 할아비를 먹어다오. 내 몸이 네 일부가 되어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내 몸에 깃든 네 엄마와 아빠도 네가 검은 땅에 도착하면 무척 기뻐할 게다.”

“못해요, 할아버지. 여기까지도 겨우 왔는 걸요. 그것도 할아버지가 있어 겨우 해냈는 걸요.”

“오엔, 얘야, 넌 잘할 수 있단다. 대기의 흐름에 온전히 너를 맡겨 보렴. 그건 네가 가장 잘하는 일이잖니. 이 할아비 냄새를 좇아 여기에 온 것처럼, 앞으로는 돌소금 냄새를 따라가 보렴. 바람 끝에서 짭조름한 붉은 바다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니? 그걸 따라가거라. 그 끝에 분명히 검은 땅이 존재할 게다.”

“안 돼요, 할아버지.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요.”

"얘야, 넌 결코 혼자가 아니란다. 이 할아비도, 네 엄마와 아빠도 늘 너와 함께 할 거란다. 네 이름이 네 엄마의 이름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게다. 여자아이는 엄마의 이름을, 남자아이는 아빠의 이름을 물려받는 게 우리의 관습이니까. 네 엄마가 얼마나 용감했는지 네가 알면 깜짝 놀랄 게다. 네 아빠는 또 어떻고? 얼마나 지혜롭고 다정했는지 모른단다. 이제 너는 나를 통해 네 부모와 다시 만나는 거란다. 어쩌면 그들의 재능도 갖게 되겠지. 얘야, 이 할아비가 지금 얼마나 기쁜지 아니? 마침내 내게 주어진 운명을 완수했으니 말이다. 이제 나도 쉴 때가 되었단다."

촌장 할아버지의 검은 형체 뒤로 커다란 별똥별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공동체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영웅의 마지막 길을 안내하려는 듯 길게 꼬리를 드리우고 환하게 빛났다. 오엔은 울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는 정말 기뻐서 떨렸기 때문이다. 오엔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비록 몸은 하나지만 자신 안에 수많은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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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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