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44년 7월
촌장 할아버지의 흐릿한 형체 너머로 아름다운 별똥별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공동체를 위해 평생을 바친 영웅의 마지막 길을 안내하려는 듯 길게 꼬리를 드리우고 환하게 빛났다. 오엔은 울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는 정말 기뻐서 떨렸기 때문이다. 그는 최후의 한 걸음까지 나아갔고, 그녀는 끝까지 곁을 지켰다. 그리고 오엔은 약속을 지켰다. 하늘에서 슬프도록 아름다운 별비가 내리던 밤이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 안에 사랑하는 이들이 깃들어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밤바람에서 붉은 바다 향기가 희미하게 전해졌다.
오엔은 엄마와 아빠, 촌장 할아버지와 얼굴도 본 적 없는 수많은 탐험대원들이 멈춰 섰던 자리에서 다시 힘차게 달렸다. 촌장 할아버지는 특별한 재능이 그녀를 검은 땅에 닿게 해 주리라 말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마을을 유한의 굴레에서 구원한다면 그 공(功)은 미지의 세계에 끈질기게 도전한 탐험대원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들은 실패하지 않았다. 훗날 누군가 검은 땅에 이르도록 차근차근 길을 만든 것이다. 이제 그들이 목숨 바쳐 닦아 놓은 운명의 길을 그녀가 달렸다. 비록 그녀가 검은 땅에 닿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나아간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다음 세대가 그녀가 멈춘 자리에서 시작할 테니 말이다. 오엔은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어찌나 가벼운지 가끔은 허공에 붕 뜬 채 달리는 것 같았다. 행복해도 눈물이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울면서 달리고 달리면서 울었다. 이제 살랑대며 부는 바람에도 짭조름한 돌소금 냄새가 물씬 풍겼다. 더 이상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금단의 땅이 끝나갔다. 저 멀리서 검은 땅이 그녀를 기다렸다.
오엔은 무(無)의 세계를 가로질러 마침내 검은 땅에 도착했다. 이제껏 그녀가 보지 못한, 아니 상상도 하지 못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보드라운 대지는 아늑했고 평화로웠다. 사방이 온통 검은 이끼로 뒤덮여 마을 주민이 평생 먹을거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성싶었다. 애써 땅을 파헤치지 않아도 좋았다. 전설은 모두 사실이었다. 검은 땅이야말로 그들이 간절히 찾던 지상 낙원이었다. 메마른 붉은 대지나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는 모래폭풍도 없었다. 숨 막히게 대지를 뒤덮는 먼지구름도 없었다. 마침 하늘에서 수없이 많은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너무 놀란 오엔은 그 자리에 돌멩이처럼 굳었다. 재빨리 바이오 슈트를 두르려고 했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챘다. 외피에 떨어지는 물방울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물방울은 뜨거운 대기를 식혀주기도 했다. 날씨를 예측하는 그녀도 처음 겪는 신비한 경험이었다. 오엔은 떨어지는 물방울 사이를 신나게 달렸다. 가끔 미끄러져 넘어졌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오엔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검은 땅에서 숨 쉬는 모든 순간이 낯설고 신기했다. 검은 땅에 정착한다면 선조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물방울 사이를 달리던 오엔은 문득 붉은 바다가 보고 싶었다. '바다'라는 말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없는 공간과도 같았다. 그 공간에 의미를 채워 넣을 차례였다. 대기의 흐름 속에서 바다의 향기를 느꼈다. 돌소금 냄새가 물씬 풍겼다. 냄새를 쫓아 붉은 바다를 향해 달리려던 순간, 갑자기 대기를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엄청난 바람이 검은 땅 일대를 덮쳤다. 강한 바람에 밀려 가만히 서있기도 힘들었다. 지난번 마음을 덮친 돌풍과 놀랍도록 닮았다. 아니, 기억을 더듬자 꿈속에서 본 장면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오엔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두려움 때문인지 설렘 때문인지 그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물방울 사이로 거대한 비행 물체가 모습을 나타내더니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낯선 존재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바람은 더욱 거세졌고, 요란한 소리도 천둥소리처럼 느껴졌다. 왜소한 그녀의 몸으로 버티기 힘들었다. 하지만 오엔은 낯선 존재가 그토록 기다려 온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녀가 정신 감응을 통해 우주로 흘려보낸 목소리를 듣고,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화성을 찾은 지적 생명체가 틀림없었다. 광활한 우주에 자신들밖에 살지 않는다면 엄청난 공간 낭비라던 촌장 할아버지가 옳았다. 오엔은 재빨리 바이오 슈트를 온몸에 둘렀다. 꿈속에서처럼 금방 사라질까 봐 비행 물체를 향해 힘차게 달렸다. 그리고 정신 감응으로 우주인에게 외쳤다.
"당신들은 어는 별에서 왔나요? 내 목소리를 들었나요? 우리를 선조들의 고향 지구로 데려가 주려고 왔나요? 우주에는 당신 말고도 다른 존재들이 있나요? 우주는 얼마나 넓은가요?"
몽상가라고 놀림받으며 외톨이로 지내던 시절, 밤하늘을 바라보며 가슴속에 품었던 질문들이었다. 이제 그 질문들에 대답을 구할 차례였다. 강한 바람에 자꾸만 몸이 뒤로 밀렸지만, 오엔은 멈추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그러는 사이 비행 물체가 검은 땅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비행 물체의 머리와 꼬리에서 빠르게 돌아가던 기관이 천천히 멈추었다. 그러자 거센 바람도 대기에 구멍을 뚫을 것 같던 천둥소리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몸이 한결 자유로워진 오엔은 다시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녀가 비행 물체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사이, 돌연 비행 물체의 옆구리가 양쪽으로 젖혀졌다. 그리고 마침내 외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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