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별의 전설. Chapter 8

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44년 7월

by 조이홍

Chapter 8. 붉은 별


거대한 비행 물체에서 내린 외계인과 마주한 순간, 거침없이 나아가던 오엔은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 어릴 때부터 품었던 궁금증에 대한 갈망보다 DNA에 새겨진 은신 본능이 그녀의 사고를 앞질렀다. 돌발 행동에 가장 많이 놀란 건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검은 이끼로 뒤덮인 동굴에 몸을 숨긴 오엔은 심장이 어찌나 쿵쾅거리는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밀어 넣었다.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려던 찰나에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계인은 그녀가 상상했던 모습과 놀랍도록 일치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머릿속을 훔쳐보기라도 한 듯이 상상 속 외계인이 현실에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녀 자신은 편평하고 납작한 몸에 길게 발달해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세 쌍의 다리와 정신 감응을 주고받을 수 있는 한 쌍의 더듬이를 가졌지만, 그녀가 머릿속으로 그린 외계인은 완전히 달랐다. 오엔의 상상 속 외계인은 단지 두 쌍의 튼튼한 다리만을 가졌다. 굵고 곧은 한 쌍은 땅을 단단히 딛고, 얇고 잘 휘는 다른 한 쌍은 자유롭게 하늘을 향했다. 긴 더듬이가 없는 대신 하늘로 향한 다리가 다양한 일을 도맡았다. 보름달처럼 커다란 눈은 하늘을 바라보았고, 석양처럼 붉은 입술은 별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특징은 압도적인 크기였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개척자의 탑보다 수백 배는 더 큰 외계인의 몸을 상상 속에서 얼마나 신나게 달렸는지 모른다. 그토록 눈에 익은 외계인을 앞에 두고, 수많은 질문에 답해 줄 지적 생명체를 남겨 두고 오엔은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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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대통령 직속 기관인 '생물 다양성 관리청' 산하 '대멸종 야생생물 조사단'의 두 조사원이 차세대 헬리콥터 수리온-Ⅲ에서 내렸다. 여섯 번째 대멸종에서 살아남은 야생생물을 조사하고 생존한 개체를 확보해 종의 다양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이들의 주요 임무였다. 점점 뜨거워지는 지구를 멈추지 못한 인류는 평균 기온을 3℃나 상승시켰고, 결국 유난히 뜨거웠던 12월에 지구로부터 두 번째 호된 경고를 받았다. 두 번째 경고에 비하면 무시무시했던 '파멸의 주간'은 아이들 불장난 수준에 불과했다. 해수면이 무려 1.5m 상승했고, 이로 인해 도서 지역과 대다수 해안 마을이 바닷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간신히 화를 면한 내륙 도시들도 안전하지 않았다. 거주지역 대부분에 극한 고온 현상이 발생했고, 일부 지역은 폭우가 또 다른 지역은 가뭄이 살아남은 이들을 괴롭혔다.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물들던 들판이 빠르게 사막화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전 세계적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산불이 번져 수개월간 지속되었다. CNN에서 소개한 한 장의 위성사진이 세계인들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아름다운 푸른 별 지구가 온통 화염에 휩싸여 붉은 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참혹한 재난 앞에서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각자의 신에게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멈출 수 있을 때 멈추지 못한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불행이 어느 날 거짓말처럼 멈추자 살아남은 이들은 다시 일상을 꾸려나갔고, 이듬해 치러진 선거에서 생태주의와 종(種)의 공존을 내세운 '녹색 미래당'이 압도적인 승리로 집권했다. 생물 다양성 관리청은 새로 출범한 정부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설한 정부 조직이었다. 휴대용 적외선 열화상 카메라를 이리저리 조작하던 조사원이 잔뜩 풀이 죽은 채 동료 조사원에게 말했다.

"사라졌어요. 분명히 봤는데…. 조금 전까지 작은 곤충이 이곳에 있었다고요."

"진정해요. 한 조사원. 이 지역은 바닷물이 빠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생명체가 살 수 없어요. 그건 한 조사원이 더 잘 알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요."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해요. 오늘은 늦었으니 일단 본부로 복귀하고 다음에 제대로 장비를 챙겨 와 조사해 보자고요. 어때요?"

"네, 어쩔 수 없네요. 그렇게 해요."

"참, 한 조사원, 그거 알아요? 저기 보이는 푸른 바다 어딘가에 온누리 우주센터가 수몰되어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저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온누리호에 알 수 없는 기술적 결함이 발생해 지구로 복귀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불시착으로 폭발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에요. 만약 그때 온누리호가 임무에 성공했다면 인류가 화성에 이주할 수 있었을까요. 그럼 한 명이라도 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에요. 참 엉뚱하죠?"

"엉뚱하기는요. 꿈꾸는 건 자유잖아요."

두 사람은 다시 수리온-Ⅲ에 올라탔다. 프로펠러가 천천히 돌기 시작하더니 이내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빠르게 회전했다. 수직으로 이륙한 슈퍼콥터는 온누리 우주센터가 있던 바다 위를 크게 한 바퀴 돌더니 어느새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던 오엔은 비행 물체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두근대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킨 그녀는 이 모든 게 하나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전설인 줄로만 알았던 검은 땅에 닿았고, 상상 속에 존재했던 지적 생명체와도 만났다.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는 두 가지 사건이 한날한시에 벌어진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오엔은 그 이유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것이 자신의 또 다른 운명임을 깨달았다. 물론 당장은 급한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누리와 마을 주민들을 검은 땅으로 데려와야 했다. 당분간 외계인의 존재는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때로 어떤 사실은 가슴에 묻어두는 편이 나았다. 대멸종 야생생물 조사단이 다시 이 지역을 조사해도 걱정할 게 없었다. 어둠 속에서만 존재하고 불을 켜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기에, 아무리 최첨단 장비를 가진 조사단이라도 이들을 발견할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했다. 이것이 어머니 지구의 협력자로서 수억 년을 이어온 그들만의 특별한 생존 방식이었다. 오엔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람 끝에서 돌소금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랬다, 가까이에 붉은 바다가 있었다. 그녀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바다가 그리워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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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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