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63년 6월
국지성 호우처럼 몰아치던 재채기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눈이 따끔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난 수십 년간 안면 마스크와 복합소재 슈트를 착용했던 태준의 몸은 그의 바람과 달리 자연 호흡에 적응하지 못하고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오랜 세월이 자연 호흡을 생경하게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기와 직접 부대끼며 숨 쉬던, 세포 하나하나까지 생기발랄하던 청춘의 육체가 더 이상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 상용화 단계에 들어선 복제 기술과 정교해진 장기 이식술로 언제라도 튼튼한 인공 장기나 복제 장기를 이식할 수 있었지만, 태준은 왠지 그런 식으로 젊음을 연장하는 게 마음 내키지 않았다. 그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구닥다리 보스’라고 수군대는 이유이기도 했다. 태준도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무어라 부르는지 잘 알았지만, 딱히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만이라도 물 흐르듯 자연스레 살고 싶었다. 초박막 강화유리 소재의 안면 마스크와 차세대 우주복으로 주목받던 BNNT(질화붕소나노튜브) 슈트는 공기 정화 기능뿐만 아니라 오염된 대기를 완벽하게 차단해 신체를 보호하는 역할까지 겸했다. 대기가 다시 깨끗해져도 오랜 시간 과학 기술의 품 안에서 보호받던 육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태준은 방금 전 주머니에 넣었던 캡슐을 다시 꺼낼지 망설였다. 그때 저 멀리 오래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아들이 잠든 곳이 얼마 남지 않았다. 태준은 이대로 마스크 없이 가보리라 마음먹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들에게 주름진 얼굴 그대로를 보여주리라 마음먹었다. 서율에게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얼굴이 더 자연스러울 테니까.
아들에게 자주 찾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수석연구원을 맡게 되면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던 태준은 한동안 서율에게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햇수로 3년 만의 재회였다. 그리운 마음에 미안한 감정이 더해져 지친 그의 육체를 잡아끌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30여 분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자 마침내 태준은 오래된 아름드리나무 앞에 도착했다. 아들이 잠들어 있는 느티나무였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자신도 모르게 태준은 짧은 감탄사를 토해냈다. 3년이라는 긴 시간도 대지가 불타버릴 듯한 무더위도 이 나무만큼은 어쩌지 못한 듯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셀룰로오스나노섬유(CNF) 소재 보호 장갑을 벗어던진 태준은 지그시 눈을 감고 나무 주위를 돌며 생생한 자연의 근육을 어루만졌다. 손끝에 전해지는 까슬까슬하면서도 보드라운 질감이 기분 좋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날 것 그대로의 감촉이었다. 한반도 전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느티나무는 집이나 가구를 만들 때 사용하고, 관상용으로도 좋아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 낙엽교목이었다. 태준이 어렸을 때는 오래된 마을이나 학교에 가면 마치 그곳의 진짜 주인처럼 나이 든 느티나무 한 그루가 신령스럽게 서 있었다. 파멸의 주간 이후 많은 동식물이 자취를 감췄고 느티나무도 머지않아 같은 운명에 처할 터였다. 이제 한반도에 자생하는 느티나무는 채 열 수가 되지 않았다.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견디며 서율과 수많은 이의 영혼의 쉼터가 되어준 이 신비한 느티나무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노거수(老巨樹)였다.
한참 동안 아들과 무언(無言)의 대화를 나누던 태준은 잊고 있던 무언가가 떠오른 듯 둘러메고 있던 작은 배낭에서 태블릿 PC를 꺼내 재빨리 전원을 켰다. 접이식 화면 한쪽에 앳된 모습의 서율이 자기 얼굴보다 두 배는 커다란 축구공으로 장난치는 모습이 보였다. 뭐가 그리 신났는지 까르륵까르륵 웃음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한참을 뛰놀다가 그만 공에 걸려 넘어진 서율이 울음을 터뜨리자 황급히 달려가는 태준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미 수천 번도 넘게 본 동영상이었지만 태준은 작은 화면 속에 박제된 아들을 볼 때마다 매번 거짓말처럼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터졌다.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오염된 대기 탓으로 돌린 태준은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가슴속 해묵은 감정들이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는 요즘도 다 자란 아들이 "아버지"하고 부르며 성큼 다가올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이성과 논리의 세계에서 마법 같은 환상은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기적을 갈망했다. 경험에 근거한 합리성만을 추구하는 그도 어쩔 수 없는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한참 동안 소리 내어 울던 태준은 스스로도 겸연쩍다고 느꼈는지 흐르는 눈물을 얼른 훔치고 동영상 앱의 닫기 버튼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동영상 화면이 사라지자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서율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 바탕 화면을 가득 채웠다. 물론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기 때 찍은 사진 한 장이면 아이의 장래 얼굴을 나이대별로 그려낼 수 있었다. 빅 데이터를 통한 인공지능의 딥러닝 기술 덕분이었다. 오래전에 상용화되어 수백 가지 애플리케이션이 유행할 만큼 흔해빠진 기술이었다. 결혼을 앞둔 젊은 연인들 사이에서 한 차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유행이란 게 늘 그렇듯이 활활 타오르다가 이내 시들해졌다. 그러다 파멸의 주간 이후 가족, 특히 아이를 잃은 부모들에게 주목받으며 또 한 번 황금기를 맞이했다. 기술 추종자들은 사람들이 늘 새로운 기술에 목말라 하기에 감상적인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핏대를 세웠지만 사실 과학 기술도 살짝 겉옷만 바꿔 입을 뿐 다른 유행처럼 돌고 돌았다. 태준은 마치 유전자 가위로 자신과 아내의 DNA를 정확히 반반씩 잘라내 합쳐놓은 듯한 아들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한 눈매며 오뚝한 콧날은 영락없이 아내를, 지그시 다문 입술과 동그란 얼굴은 자신을 꼭 빼닮았다. 아들이 살아있다면 정말 이런 얼굴일 것 같았다. 또 한 번 눈치 없는 눈물이 흐르려 하자 태준은 재빨리 다른 쪽 화면을 작동시켰다. 화면 중앙에 ‘다시 시원해진 어머니 지구’라는 커다란 제목이 경쾌한 음악과 함께 등장했다.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중 화사한 봄날의 풍경을 묘사한 ‘봄’이었다. 제목이 서서히 사라지자 그 자리에 몇 개의 단어들이 심연에서부터 떠올라 천천히 화면 위를 유영했다. '1997년 교토의정서,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 2035년 오슬로기후재앙협정, 2060년 서울기후협약….' 태준은 마치 수천 명의 청중 앞에 선 연사처럼 헛기침 몇 번으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이런 연설에 제법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가슴에 묻어 두었던 말을 꺼내기 위해 태준은 몇 차례나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낯선 공기가 제법 익숙해졌는지 더는 얄미운 재채기가 훼방 놓지 않았다.
“서율아, 지금부터 아버지가 하는 말이 어쩌면 네겐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구나. 솔직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지만, 꼭 한 번 너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단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고, 또 떠난 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이야. 그리고 우리 별이 어떻게 다시 숨 쉴 수 있게 되었는지도. 여기 이 이름들 보이지? 일부 극단적 음모론자들이 결과만 놓고 삿대질하는 것처럼 앞선 세대를 소비와 향락에 눈먼 쾌락주의자로 묘사하는 건 과한 측면이 있단다. 그들도 노력했다는 증거는 수없이 많으니까. 꽤 의미 있는 진전도 있었지. 때로는 공염불에 그칠 때도 많았지만 그들도 변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단다. 너무 늦게 철든 게 문제였지. 너도 알다시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잖아. 솔직히 처음 몇 번은 구호만 요란할 뿐 실속 하나 없었어. 온실가스를 줄이자고 합의해 놓고는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대책 없이 뿜어내는 공장들을 연거푸 건설하기도 했지. 어렵게 국제 사회의 합의를 이끌었던 국가가 협약을 탈퇴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어. 맞아, 거짓말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어. 당시로서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지구나 얼굴도 모르는 후세를 위해 눈앞에 놓인 달콤한 열매를 포기할 사람들이 많지 않았거든. 게다가 정치인들이란 말 바꾸기 선수잖아.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한 약속도 헌신짝처럼 내다 버리기 일쑤였지. 경제적 이윤 추구가 존재 목적인 기업들은 말할 것도 없었어. 착한 소비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었어. 마치 테라포밍으로 화성을 제2의 지구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한 어느 정신 나간 기업가의 말처럼 말이야. 그럴싸한 말들로 사람들의 판단을 흐트러뜨리고 착한 소비가 유일한 해법인 양 부추겼지. 그 결과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토해냈단다. 사소하더라도 의미 있는 행동을 실천에 옮겨야 할 황금 시간에 눈을 질끈 감고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도록 만든 셈이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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